
민석은 그 남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Believer
W. 희미
수능이 끝났다. 대학은 운 좋게도 성적보다 높은 곳을 갔다. 경영학과였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달리 가고 싶었던 곳도 없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은 눈이 왔다. 부연 먼지처럼 힘없이 흩날리던 눈은, 손끝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민석은 그 손이 다 젖어 발갛게 얼 때까지 교문 옆 담장 밑에 서 있었다. 그리고 3일 동안 감기를 앓았다.
학교는 그런 민석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출석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었다. 다른 애들처럼 민석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누구는 여행을 가고, 누구는 알바를 하고, 누구는 벌써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민석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하다못해 게임 따위도 하지 않았다. 김민석의 열아홉 끄트머리는 그렇게 무료했다. 해가 높이 오르면 민석은 집에서 나와 아무 버스나 올라탔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때 즈음에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버스로 갈아탔다. 서울을 반 바퀴쯤 돌아 완전히 낯선 곳에서 내리기도 하고, 몇 시간 만에 출발했던 제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했다. 초점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앱에서 제멋대로 골라내어준 리스트의 낯선 곡들이었다. 당신이 좋아할 음악, 들어야 할 음악.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민석에게는 뭐든 상관없었다.
버스는 올림픽 공원을 끼고 길게 돌았다. 어제부터 시작된 한파 때문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민석은 가장 인적이 없어 보이는 곳에 내렸다. 발이 땅에 닿자 사각, 작은 눈 조각이 코 끝에 걸렸다. 바람도 제법 찼다. 민석은 대로변의 프랜차이즈 카페를 끼고돌아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얼마 걷지 않아 일곱 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는 카페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폭신한 온기가 뺨을 감싸 쥐었다. 테이블은 반쯤은 비어있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시끄럽지 않았다. 민석은 메이플 시럽과 휘핑크림이 올라간 바나나 팬케이크와, 핫 초콜릿을 주문했다.
“재영아, 팬케이크 하나.”
“응.”
주문을 받은 여자의 말에 대답한 남자는 뒤돌아서 스팀밀크를 만들고 있었다. 앉아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여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민석은 밖이 내다보이는 가장 바깥쪽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밖이라고 해 봤자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반대편의 노출 콘크리트 빌딩 1층 정도였다. 듣고 있던 곡은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토독, 토독. 민석은 잘게 나누어진 리듬에 따라 손톱 끝으로 도톰한 나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주문하신 팬케이크와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높다란 건물 틈 사이로 비스름하게 들어오는 오후의 햇볕을 타고 민석의 시선이 남자의 손끝을 따라 얼굴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민석은 그 남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남자 또한 민석을 단번에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색을 바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민석은 황망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쫓아 가 붙잡아 봐야 하나? 민석은 바 안쪽으로 들어간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민석을 바라보는 일은 없이, 주문으로 들어온 커피와 팬케이크 따위를 계속 만들고 있었다. 민석의 팬케이크 위의 휘핑크림은 흐물하게 녹아, 시럽과 함께 제 형체를 잃고 뭉그러졌다. 뜨거워 얼었던 손이 데일 것 같던 핫 초콜릿도, 이내 미지근하게 식었다. 민석은 그것들을 입에 대지도 못 했다. 남자는 가끔 웃고, 가끔 말을 했다. 주문을 받으며 단골인듯한 손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민석의 옆 테이블의 사람이 두 번째 바뀔 때 즈음 남자는 백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카페를 나섰다. 민석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걸음이 빨랐다. 남자는 대로변이 아닌 골목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민석이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골목은 고요해 둘의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남자는 두 번째 골목의 코너를 돌아 있는 작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민석은 꼭 제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반대편 건물 사이의 틈에 들어가 몸을 보이지 않게 했다. 남자는 얼마 후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와 그 안에 들어있던 담배 한 갑의 포장을 풀었다. 담배를 입술 끝에 문 남자와 민석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찾아냈다. 그리고는 곧장 민석에게로 다가왔다. 민석은 당황해 차오르는 숨을 참았다.
“개새끼냐?”
졸졸 따라다녀, 짜증 나게. 남자는 급하게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좁은 공기를 울렸다. 이제, 나 알고 있죠? 이런 질문은 할 필요도 없어졌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민석은 건물에 바짝 붙어 섰다. 거친 벽면 위에 닿은 손바닥 뒤로 눅눅한 냉기가 느껴졌다. 앞뒤로 꽉 막힌 건물들 때문인지, 바람은 차라리 잠잠했다. 아직은 해가 높은 시간이었음에도,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그늘이 졌다. 남자는 촉감이 좋아 보이는 두툼한 회색 후드 주머니에 다른 한쪽 손을 넣은 채 비스름히 서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스며나온 담배연기가 얼굴을 흐렸다. 불쾌한 냄새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자, 남자는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밟아 껐다. 그리고 한 발 더 다가와 손으로 민석의 얼굴 양옆을 짚었다. 이제 남자의 날숨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열아홉.”
처음에 민석은 그게 제 나이를 말하는지도 몰랐다. 남자는 민석의 가지런한 앞머리 끝을 천천히 매만졌다. 남자의 숨에는 담배와, 커피와, 달콤한 초콜릿의 흔적이 뒤엉켜 있었다. 남자의 손끝이, 민석의 뺨에 있는 작은 점에 닿았다. 민석에게로 낯선 체온이 흘러들었다.
“안 닮았네.”
남자는 민석으로부터 한발 물러섰다.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때는 말로 안 끝나.”
남자는 비식 웃으며 말했다. 그때에 안쪽으로부터 돌연 바람이 불어, 남자의 새까만 머리가 흐트러졌다. 그런 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남자는 손을 뻗어 민석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것처럼 쓸어내렸다. 그 손바닥에서 미미한 사막의 모래 냄새가 났다. 남자는 손가락 끝에 편의점의 비닐봉지를 끼고 민석에게서 돌아섰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민석은 어느새 저만큼 앞서가는 남자의 뒤에서 소리쳤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민석의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턱 밑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남자는 이상한 남자였다.
그리고 이상한 날이었다.
남자의 머리는 여러 번 탈색을 한 듯 부스스했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재색도 크림색도 아니었다. 그 중간 어디쯤엔가 있을 것 같은, 민석은 알지 못하는 이름의 색이었다. 얼마간은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둔 것처럼, 목덜미에서 오르는 끝이 일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입고 있는 후드도 그랬다. 난잡해 보이는 원색의 마블링 무늬가 시야를 흐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대여섯 줄, 프린트된 글자는 독일어 같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남자는 민석의 집 거실의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막 집에 돌아온 차였던 민석은 남자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남자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민석의 부모였다. 민석의 어머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은 어떻게든 남자를 피하기 위해 베란다 너머의, 그 흔한 구름조차 없는 허공을 향해 있었다. 민석의 아버지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은 민석이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민석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매우 짧은 찰나였지만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시간의 배속을 조정한 것처럼, 남자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보였다. 남자는 조금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민석아.
다급하게 민석을 부른 것은 민석의 아버지였다. 그와 동시에 남자와 민석의 어머니도 민석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머리를 탈색하지 않았다면 중학교에 갓 입학한 민석에 비해 겨우 서너 살이나 많을 것 같았다. 남자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후드는 집업이어서, 열어둔 사이로 감색의 타이가 느슨하게 걸린 셔츠가 보였다. 도무지 무엇 하나 이곳과 제대로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민석이는 방에 들어가 있어.
민석의 어머니의 말투는 평소와 달랐다. 다급하고 톤이 높았다. 남자는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민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두덩이가 조금, 붉게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이 민석의 마음에 걸렸다.
제가 갈게요.
남자가 일어섰다. 목소리가 잠긴 것처럼 낮았다. 남자는 미리 머릿속에서 가늠해 보았던 것처럼 저보다 키가 컸다. 러그도 없는 대리석의 맨바닥이었다. 얼마간이나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인지 몸을 일으키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남자는 다시, 아주 잠시간 민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이 민석과 남자의 틈에서 녹아내렸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민석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 조차 없었다는 듯 굴었다.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민석은 어렸지만 물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묻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이름은 재영이었다. 민석은 그것을 삼일째 되는 날에 알았다. 심재영. 민석은 여자가 부른 남자의 이름을 몇 번이나 속으로 삼켰다. 혀끝이 바짝 말라, 단내가 났다. 말로 끝나지 않을 거라던 재영은, 민석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주문을 받는 얼굴색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뿐이었다. 핫 초콜릿, 사천오백 원입니다. 카드를 건네받고, 휘핑 위에 초콜릿 가루가 가득 뿌려진 핫 초콜릿을 내어다 주었다. 그대로 쫓겨나거나, 정말로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하거나, 제법 각오를 하고 찾아간 민석은 맥이 빠질 정도였다. 일을 마친 저를 쫓아오는 민석을 피하지도 않았다. 재영의 집은 카페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인 것 같았다. 옅은 회백색의 건물은 아직 건축 자재 냄새가 났고, 얼룩 하나 없었다. 물론 입구 안쪽까지 따라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쫓아가 붙잡고 말을 붙여볼 자신도 없었다. 거기까지였다. 카페에 찾아가고, 뒤를 쫓아가고, 다시 돌아서고의 반복이었다. 딱 두 걸음,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민석에게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언젠가는 저를 돌아볼 거라는, 그 두 걸음을 좁힐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너...”
열흘하고도 또 삼일째가 되는 오늘처럼, 뒤돌아 말간 시선을 맞추어 주는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재영의 걸음이 느렸었다. 항상 들르던 편의점에도 가지 않았다. 집을 얼마 앞두고 재영은 뒤를 돌아 민석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재영은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화가 난 표정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피곤해 보였다.
“원하는 게 뭐야?”
“그런 거 없어요.”
골목은 지나는 사람이 없어, 크지 않은 둘의 목소리가 그 안을 울렸다. 그 일렁이는 공기의 흐름이 민석에게 스며들었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그럼 뭐야?”
“보고 싶어서요.”
웃었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제가 신기해서 민석은 웃었다. 하, 재영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재영의 구겨진 미간은 민석을 한발 더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재영은 혼잣말처럼 읊조리듯 말했다. 마른 세수를 하는 재영의 오른손 사이로 부연 입김이 샜다. 코 끝이 차가웠다. 저만치 낮은 구름 아래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알아요.”
“뭐?”
“심재영.”
“그런 게 아니고.”
“제 이름은 김민석이에요.”
민석의 온몸이 떨려왔다. 저도 이것이 재영에게 있어서는 터무니없을 말장난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어째서 재영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것은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앞으로 재영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더더욱 그랬다.
“집에, 가. 그리고 다신 오지 마.”
재영의 목소리는 버석하게 메말라 귓가에 닿기도 전에 다 바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싫다면요?”
민석은 한 걸음을 더 떼었다. 이제 희미하게 재영의 체향이 느껴졌다. 재영은 물러서지 않고 저를 올려다보는 민석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어두운 밤의 색을 띤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민석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꽈악 막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삼킨 다음에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재영은 문득 손을 들어 결이 좋은 민석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제법 내린 눈을 털어냈다. 그 사이로 희미한 온기가 스몄다. 바라본 재영의 머리카락에도 내린 눈이 많이 내려앉아있었다.
“여기에 다신 오지 마.”
꼭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 같은 말투였다. 흐리게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재영은 이내 민석을 두고 그대로 뒤를 돌아 제 집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민석의 언 손끝이 따가웠다. 그럼에도 민석은 몇 번이나 눈에 젖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렇게 하면 그 온기가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한참이나 재영의 사라진 그림자 끄트머리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날 밤 감기에 걸렸다. 열이 39도와 40도를 오갔다. 눈앞이 흐렸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미숙아로 태어나자마자 심장수술을 했다. 그런 것들이 내로라하는 큰 대학병원의 소아과 의사였던 민석의 어머니를 괴롭게 했다. 그래서 감기 정도는 민석 혼자 알아서 했다. 해열제도, 감기약도, 집에 있는 것은 다 털어 넣었으니 이제 괜찮아질 거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몸에서 올라온 열기로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더웠다. 민석은 온몸이 조각조각 아픈 것보다, 텅 빈 집에서 그것을 혼자 견뎌내는 것보다, 카페에 가지 못하는 것이, 재영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서러웠다. 오지 말라고 했다고 정말 가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릴까봐, 그게 불안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릴까봐, 그게 무서웠다. 나쁜 생각은 맑은 물에 스며든 새까만 잉크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결국, 카페까지는 택시로 갔다.
재영은 정말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떴다. 주문을 받지도 않고, 민석의 손에 쥐어진 카드를 채갔다. 그런 재영의 얼굴이, 눈으로 올라온 열감으로 파도의 흐름처럼 일렁였다. 항상 앉던 자리에는 누군가 앉아 있어, 민석은 가장 구석진 자리로 갔다. 딱딱한 나무의자 때문에 몸이 더 아팠다. 흰색의 페인트가 발라진 벽에 뺨을 대었다. 콘크리트의 서늘한 냉기가 머리를 울렸다. 핫 초콜릿은 재영이 아닌, 여자가 가지고 왔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바라본 재영은 저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석은 일부러인지 자신의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재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고 싶고, 보고 싶고,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저 뒷모습을 이렇게나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열 때문에 뭉근하게 녹아내린 머릿속에서 차오른 감정이 한계까지 찰랑거렸다.
민석은 똑같은 시간에 백룸에서 나온 재영을 쫓아 나가 그 뒤를 걸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온 몸이 벌벌 떨렸다. 눈 앞의 골목길이 제멋대로 오르고 내려 어지러웠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제대로 된 생각 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
“야, 너...”
“... 추워.”
재영의 팔을 붙잡았다. 이제 몸에 힘도 빠져, 그대로 매달렸다고 하는 쪽이 더 맞을지 몰랐다. 제대로 좀 서 봐. 귓가에 닿은 것이 조금은 걱정해주는 것 같은 말투여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민석은 붙잡은 재영의 옷을 있는 힘껏 꽈악 구겨 쥐었다. 뺨에 닿은 천의 질감이 부드러웠다. 그게 좋아서 얼굴을 묻었다. 손에 쥔 온기가 어지럽던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재영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조심스레 닿은 발끝에 사각사각 밟히는 이른 봄의 여린 풀 냄새가, 알록달록 뒤섞인 달콤한 과일 스무디의 냄새가, 날이 좋은 날 말려둔 이불에서 나는 햇살의 냄새가 났다.
“정신 좀 차려봐, 너...”
민석이 두 번째로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였을 때, 재영은 쉽게 민석을 안아올렸다. 민석은 옷을 쥐고 있던 두 팔로 재영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몸이 청량한 여름 하늘의 가벼운 뭉게구름처럼 둥둥 떠올랐다. 닿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웃었다. 웃음이 차올랐다. 재영도 웃었다. 아마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미치겠네.”
민석은 두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규칙 없이 제멋대로 쌓인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양장본의, 제목만으로는 무슨 책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옆으로는 자그마한 화분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시든 구석 하나 없었다. 의외의 것들이었다. 그 위의 높은 창으로 짙은 귤색의 노을이 들었다. 그 반대편에는 빌트인의 작은 부엌과 냉장고, 세탁기가 있었다. 세탁기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부엌은 사용하지 않는 것 인지 제대로 된 식기가 없었다. 카페에서 쓰는 것과 같아 보이는 머그컵만 두어 개 있었다. 고개를 조금 들어 앞을 바라보자, 작은 철제 테이블에 앉아있는 재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것도 키워요?”
“이제 살만한가 보네.”
이름을 알 수 없는 화분들을 가리키는 민석을, 재영은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었다. 민석은 아직은 버겁게 몸을 일으켰다. 손등을 덮은 옷은 제 것이 아니었다. 민석은 그 옷과 재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아...”
“건조하는 중이니까 니 옷은 입고 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거. 다가온 재영이 건네준 것은 약국의 비닐봉지에 담긴 약들과 물 한 잔이었다. 재영의 손바닥이 민석의 젖은 이마에 닿았다.
“열은 좀 내린 것 같으니까, 택시 불러줄게. 타고 가.”
“왜 자꾸.”
“...”
“왜 자꾸 다 안된다고만 해요.”
꾹꾹 제 힘을 다해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새하얗게 터졌다. 하고 싶었던 말,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뒤엉켰다. 그래서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졌다. 민석은 아직 다리를 덮고 있는 회색 이불을 구겨 쥐었다. 점점이, 그 위에 짙은 색이 더해졌다.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럼, 그럼 다 괜찮은 거 아니에요?”
“... 그게, 그런 게.”
“나, 좋아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웃었다. 새빨갛게 부어올라 엉망인 얼굴로 있는 힘껏 웃었다. 민석은 젖은 두 손으로 재영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재영은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민석은 천천히 깜빡이는 재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끝 모르게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삼킬 듯했다. 이미 삼켜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계까지 차올라있던 눈물이 터져 서럽게 흘렀다. 누군가 제 심장을 꽈악 쥐고 제멋대로 흔들어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숨을 제대로 내쉬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은 것은 찰나였다. 당겨진 것은 재영의 두 뺨이 아닌 민석의 목덜미였다. 거기에 닿은 재영의 손은 서늘했고, 입술에서는 눈물 맛이 났다. 말캉한 혀가 입안을 천천히 배회했다. 고른 치열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혀를 얽었다. 갈 곳을 잃은 민석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다감하게, 달래는듯한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흐. 가쁘게 숨이 차오른 민석에게서 짧은 소리가 터지고 나서야 멀어졌다. 얼빠진 얼굴의 저를 보며 피식 웃는 재영을 보고 나서야, 민석은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민석이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가, 감기.”
“감기?”
“감기 옮을지도 모르는데...”
민석은 제가 말하고도 민망해 그대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재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Believer Fin. - 선생님들 심운 츄라이 츄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