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누나가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었다. 사랑은 타이밍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일곱 살의 이승준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큰 감명을 얻은 것인지 그 대사를 가슴 속에 꼭 품고 살았다. 그리고 딱 십년 후, 지금의 이승준은 그 소리의 의미를 직접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밤비
이제 완연한 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생기를 띄는 나뭇잎들과 따스해진 공기가 승준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 걸 느낄 새도 없는 오늘의 지각생 승준은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서는 문을 열고 나와 뛰기 시작했다. 지각까지 12분 남았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승준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 했다. 초등학교때부터 잦은 지각으로 다져진 자신의 다리를 믿기로 하며 학교를 향해 뛰기 시작한 승준은 다음부턴 꼭 일찍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내 예쁜 다리 부러지면 어떡해. 조금의 자뻑은 덤이다.
지각과 빨간불을 피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온 승준은 교문 근처에서 속도를 늦췄다. 이러면 아무도 지각한 줄 모르겠지. 차분한 발걸음으로 교문을 무사통과하고 교실까지도 무사통과한 승준은 바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야 오늘 1교시 뭐냐? 물리. 진짜 듣기 싫은 물리지만 열심히는 하는 학생이라는 승준의 이미지-혼나는 게 더 싫었다-를 지키기 위해선 교과서는 펼쳐 놓아야 했다. 책상서랍을 뒤적거리다가 찾은 물리 교과서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다시 엎드려 잠시 눈을 감았다. 수업 시작할 때 종소리 들리면 깰 수 있겠지.
잠들기 전 승준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종소리를 듣고 깨긴 깼는데... 그 종소리가 점심시간 종이라는게 문제지.
“아무도 나 안 깨웠냐?”
“어. 그 유명한 물리도 니 평소에 잘 안자는 애라고 냅두던데. 이미지메이킹 한 보람이 있네.”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재윤을 붙잡고 묻자 부럽다는 투로 돌아온 대답을 믿기가 힘들었다. 정말 4교시 내내 자고 있었다니. 그래도 열심히 하던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급히 점심을 먹으러 가는 친구들을 따라 급식실로 향했다.
“야 이승준. 오늘 전학생 온건 알어?”
“아니? 몰랐는데?”
“이야... 전학생 와서 박수치는 소리에도 깨지 않는 당신의 숙면을 높이 평가합니다.”
“엥, 진심이야?”
“이름이... 김효진이랬냐?”
“엉 그럴걸?”
친구들의 대화를 영문도 모르는 채 듣고 있다가 어느새 급식실에서 돈까스를 집어먹고 있던 승준이 물었다.
“어디서 온 거래?”
“걔? 어디 시골에서 왔다했는데.. 어디더라? 이진혁 너는 기억 나냐?”
“나겠냐.”
“뭐야ㅋㅋㅋ 그럼 난 전학생 구경하러 갈래.”
이 애매한 듯 애매하지 않은 시기에 전학을 온 전학생이 궁금해진 승준은 친구들을 놔두고 반으로 향했다. 학교도 잘 모를 텐데 반 근처에 있겠지?
역시, 이승준은 똑똑해!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르는 자뻑의 힘을 강조하며 처음 보는 뒤통수가 앉아 있는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
전학생의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가 승준을 응시했다.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던 전학생의 얼굴을 보며 승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밤비?”
“어?”
전학생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처음 보는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아니 저기... 미안해”
“미안해?”
“어. 너 보니까 사슴 닮아가지구...”
“닮아서?”
“진짜 미안해...”
밤비를 닮아서 밤비라고 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혼나고 있는 것 같지? 승준은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사과를 하고 있었다. 쟤 좀 무서워.
“완전 미안해. 혹시 화났어?”
“야.”
“어?”
“너는 덤퍼 닮았어.”
“응?”
“토끼.”
전학생의 한 마디로 승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쳤나 봐. 내가 토끼를 닮았다고? 대화 내내 눈을 마주치고 있던 승준이 그제서야 시선을 돌렸다. 승준의 왼쪽 가슴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울렸다.
학교에 있는 내내 어딘가 핀트가 하나 나간 듯한 상태로 수업을 듣던 승준은 신발을 한 쪽만 갈아신고서 출발했을때 부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쟤가 왜 좋지? 난 금사빠 아닌데. 쟤 내 스타일도 아닐 거란 말이야. 나 진짜 토끼 닮았나? 내가 좀 귀엽긴 하지만...
승준이 펼치고 있던 상상의 나래는 떨리는 마음으로 초록창에 덤퍼를 치는 순간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뭐지? 나 이렇게 볼살 말랑말랑하게 생겼나? 쟤 지금 나 돌려까기 하는 거 아냐? 너무해...
아기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에 잠을 깬 승준이 침대에서 나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 없는 방 안 풍경에 소음의 출처를 찾으러 문을 연 승준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끝도 없는 하얀 공간 속에서 혼자 서럽게 울고 있는 조그만 아기 한 명이었다. 일단 우는 걸 달래 줘야 겠다 싶어서...
“그 애기한테 손을 뻗었거든? 근데 안 잡히는거야!”
“...그리고?”
“깼어.”
한가로운 주말 아침부터 승준은 창윤을 붙든 채로 자신의 이상한 꿈 얘기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아니. 그 애기가 누가 봐도. 이번 전학생. 그 김효진. 닮았단 말이야. 너 이런 꿈 해석같은거 잘 하잖아. 좀 알아봐 주면 안될까?
“승준아.”
“어?”
“친구 사이에 돈 계산은 확실히 하는 거라고 그랬어.”
“그래서?”
“풀이 듣고 싶으면 너도 돈 내.”
그냥 한번만 해주라아아- 하며 말꼬리를 늘려오는 승준을 카페에 덜렁 놓고 가버리는 창윤을 보며 승준은 개꿈으로 치부하겠다며 지갑을 확인하곤 1000원에 55분-이 동네에서 제일 싼 요금이다-하는 피씨방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3시간동안 배틀그라운드를 하며 라면까지 알차게 시켜 먹은 승준이 흥미로운 것들을 찾기 위해 거리를 활보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본 오락실 안에서 승준의 이목을 끈 것은 아이들이 하고 있는 인형 뽑기 기계였다. 막 뽑기를 시작하려고 하던 아이들을 막은 승준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형 이거 완전 잘하는데. 형이 인형 뽑아서 너네 줄까?”
“형보다 저희가 더 잘 할걸요? 얘가 이번 달에만 두 개나 뽑았다구요.”
“형 못 믿어? 인형 못 뽑으면 형아가 오천원 줄게. 잔돈 바꾸기 귀찮아서 그래.”
“알았어요,”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준 아이들에게 웃어보이고서는 뽑기를 시작한 승준은 처음 봤을 때부터 뽑고 싶었던 피카츄 인형을 향해 집게를 움직였다. 내가 뽑기를 몇년을 했는데. 하지만 피카츄를 정확히 조준했다고 생각했던 집게는 전혀 다른 위치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 집게에 걸려서 퇴출구까지 나온 인형은,
“밤비?”
귀여운 사슴 인형이었다.
“형, 인형 뚫어지겠어요. 빨리 주세요.”
“얘들아.”
“네?”
“이거 그냥 형 주면 안될까? 인형이 너무 귀여워서.”
“형이 뽑아서 주신다고 했잖아요!”
“미안해. 대신 돈으로 줄게. 이걸로 몇판 더 해서 다른 귀여운 인형 얻어!”
지갑에 잠들어 있던 오천원권 지폐를 아이들에게 던져주고 나온 승준은 신발끈이 풀린 줄도 모르는 체 인형을 한손에 달랑달랑 들고 뛰며 인형이 흔들리는 것 마냥 팔랑팔랑 뛰어서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승준의 흥얼거림에서 익숙한 미키 마우스의 주제가가 들려왔다. 인형에는 관심도 없던 승준이 작은 사이즈도 아닌, 제 얼굴만한 인형을 들고 온 모습을 본 누나들이 왜 저러냐는 표정을 지으며 떡볶이를 먹고 있었지만 모든 시선들을 무시한 채로 침대에 누워 사슴 인형을 품에 안았다. 짜증날정도로 푹신해서, 침대에 내동댕이치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김효진도 페이스북은 하지 않을까? 괜히 궁금해진 승준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 페이스북을 들어가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김 효 진. 꾹꾹 눌러서 타이핑한 세 글자를 확인하고 검색을 누르자 뜨는 검색 결과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함께 아는 친구 7명인 아저씨, 옆 이오중학교의 후배 김효진, 얘는 왜 이렇게 동명이인이 많은거야! 너무 흔한 효진의 이름을 원망하며 핸드폰의 전원을 끈 승준이 새까만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18년간 토끼는 닮았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지금 보니까 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교?
밤 늦게까지 효진의 생각을 하던 승준은 결국 지각을 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혹시나 아직 일요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핸드폰과 부모님, 누나들의 핸드폰까지 이용해 오늘의 요일을 찾아본 승준이지만, 정말 틀림없이 오늘이 월요일이고 쓸데없는 시간낭비마저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오늘의 아침밥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김치찌개인데도 못 먹었다는 서러움에 눈물이 울컥했지만 밥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기에 빠르게 나온 승준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15분. 이정도면 열심히 뛰어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을 시간이었다. 매점에서 아침 먹어야지. 피자빵? 크림빵?
오늘따라 너무 늦게 오는 듯 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안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원래도 동그랗던 승준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김효진?”
“토끼?”
“아니,”
너 왜 자꾸 나 토끼라고 불러? 라는 승준의 물음은 엘리베이터 안 탈거야? 라는 효진의 말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아 진짜. 이번에는 꼭 물어본다.
“야! 너 왜 나 토끼라고 부르냐고. 나 진심으로 토끼 닮았어?”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내 이름!”
“니가 안 알려 줬잖아.”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승준의 얼굴이 또 다시 붉어졌다. 진짜 바보인가 봐. 어떻게 이름도 안 알려줬지?
“내 이름 이승준이거든? 앞으로는 이름 불러 줘.”
노래방에서 래퍼들을 따라하던 빠르기로 자기 소개를 마친 승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마자 뛰기 시작했다. 효진을 마주하고 있어서 심장이 뛰는 것인지, 단순히 빠르게 뛰는 승준의 다리를 따라 심장도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딱 한 가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18년 인생 중 처음 시작된 짝사랑이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알 수 없는 아이에게 빠져버린, 한 마디로 예측 불가한, 가슴 저린 짝사랑의 서막이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과 여러 시험들이 지나고, 어느덧 여름방학식을 앞둔 7월이 되어 있었다. 여름이 되어 가는 동안, 효진은 이런저런 핑계로 승준을 따라다녔고, 둘은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단짝 친구로 보여지고 있었다. 물론 승준에게는 예외지만. 효진을 볼 때마다 붉어지는 제 뺨을 달래기 위해 예정에도 없던 연기를 열심히 연습하던 승준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효진의 옆에 붙어다닐 수 없었다.
방학식이라는 이유로 단축 수업을 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같이 피씨방이나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승준은 효진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야 김효진!”
“왜,”
“오늘 나랑 노래방 갈래?”
노래방. 승준이 생각하기에는 최적의 고백 장소였다. 다른 사람이 볼 일 없고. 김효진이 댄스곡을 부를 일이 없으니 분위기 잡기도 쉬웠다. 이제 방학인데. 빨리 고백하고 차이던 말던. 차이면 방학 지나고 괜찮아지겠지.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정작 그 순간이 다가오자 고민을 거듭하느라 가려던 노래방은 안 가고 자꾸만 다른 짓을 하게 되는 승준이었다.
돌아다니는 것에 지친 효진이 언제 노래방을 가냐 물어보는 탓에 노래방으로 걸음을 하던 찰나, 새파란 털을 가진 고양이가 자신의 손을 할퀴고 지나갔다. 쓰읍 쓰읍 거리며 아픈 것을 참는 승준을 보다못한 효진이 근처의 약국에서 밴드와 연고를 사 와 치료를 해주었다.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효진의 들숨 날숨이 간지럽게 느껴지는 탓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진 승준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근데 너 저 고양이 봤어? 털이 파란색이던데.”
“에? 니가 잘못 본 거겠지.”
“아니야. 분명 파란색이었어.”
“주인이 염색했나보네. 고양이를 혼자 남겨두고 간건가?”
“주인이 나빴네.”
어느새 노래방 앞까지 도착해버린 탓에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는 승준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김효진한테 차이기 싫다. 저를 향해서 웃어주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다.
“야 김효진.”
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방학은 겨울에도 또 오는거잖아?
“나 이제 돈이 없는데. 노래방은 다음에 오면 안되냐?”
아직 노래방을 갈 정도의 돈은 남아 있었지만,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적절한 거짓말을 한 승준이었다. 근데 그 대답이.
“내가 내 줄게.”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지?
효진의 페이스에 말려 노래방까지 들어오게 된 승준이 생각했다. 진짜 망했어. 이 상태에서 둘이 있으면 더 설레일 것 같단 말이야. 이미 들어온 김에 뽕을 뽑자는 생각으로 온갖 요즘 아이돌들의 노래를 적절한 춤까지 섞어가며 부른 승준이 두 곡 부를 정도의 시간을 남겨 두고 효진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제 너 해. 효진의 노래방 원픽은 눈의 꽃. 이번에도 역시 익숙하게 번호를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 얘는 어떻게 노래도 잘 부르지? 단단히 콩깍지가 끼어버린 승준이 한번 더 반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한 곡은 니가 불러.”
“난 지금까지 많이 불렀는데?”
“난 부를 노래 없는데. 시간 지나기 전에 걍 니가 해.”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받아 든 승준이 노래를 골랐다. 다시 댄스곡을 하자니 이젠 떠오르는게 없고. 이 분위기를 깨기도 싫으니 고백할 때 부르려고 했던 노래를 선곡했다. 사랑은 타이밍. 누나들이 항상 하던 얘기가 떠올라서 듣게 된 노래였다. 일단 부르고 봐야지.
오글거리는 가사를 부르는 내내 효진이 웃거나 어색함에 탬버린을 칠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듣는 효진에 당황한 승준이었다. 차라리 비웃는게 낫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까지도 어색하고 뻘쭘하잖아.
“나 노래 잘 부르지?”
“엥? 내가 더 잘부르거든.”
“뭐래 진짜...”
그 후로 집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둘 주위에 어색함이 맴돌았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각자의 층수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야 이승준.”
“어? 왜?”
“... 아니야. 잘 가.”
효진이 하려던 말이 죽도록 궁금했지만 닫혀버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에 돌아서려던 승준의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용기가 끓어올랐다. 오늘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이 바뀌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한 방이다. 사랑은 타이밍이고. 효진이 엘리베이터로 12층에서 14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승준은 빠르게 계단을 튀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효진.”
“어?”
“나 너 좋아해.”
숨소리와 섞여 뱉어지는 승준의 마음이 뜨거웠다. 효진이 제발 저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조용한 효진의 입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쟤도 좋았으면 벌써 대답을 했겠지. 고백을 할 때보다 더 뜨거워진 얼굴로 횡설수설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뱉은 승준이 계단을 황급히 뛰어내려갔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양 귀와 얼굴을 감추려 더욱 몸을 숙이던 승준이 신발끈을 밟고 미끄러져 한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온 감각이 깊고 깊은 까만 심연 깊이 잠기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계단을 내려오는 효진의 얼굴이 보였다. 이상하게 얘랑만 있으면 맨날 신발끈이 풀리더라. 이제 학교에서 어색할 일은 없겠네. 다행... 인가? 바닥에 부딪히는 기분도 들지 않았지만, 승준은 그대로 잠에 든 듯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고, 눈을 돌리니 분홍색으로 가득한 나무가 보였다. 핸드폰이 알려주는 날짜는 2018년 4월 9일, 월요일. 익숙한 날이었다. 김치찌개를 먹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김효진을 만난 그 날. 승준의 머릿속에서 나온 여러 의견들 중 제일 확실한 의견이 있었다. 내가 타임워프를 한 건가? 이렇게 구체적인 꿈이 어디 있어. 늦지도 않았는데 밥은 왜 안 먹고 가냐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집에서 나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김효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해진 승준이 학교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풀어지는 신발끈을 무시하고 학교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제발 남아 있어 줘.
그래서 교실에 효진이 있었느냐. 효진의 자리에 앉아있는 효진은 볼 수도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효진이라는 존재를 부정했다.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해 줘. 힘이 빠져 앉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괜히 울컥해져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승준이 황급히 반에서 도망쳐 나와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승준에게. 단순한 말머리로 시작하는 쪽지에 승준의 눈물이 번졌다. 누가 봐도 김효진 글씨체네. 먹먹해지는 눈을 애써 또렷하게 뜨고 쪽지를 읽으려 노력했다. 편지가 어느새 축축해져 전혀 읽을 수 없는 형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는 단 한 문장이 있었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승준아. 혼자서만 미래로 도망가 버린 효진이 야속했다. 너도 좀 기다려 봐라. 진짜 진짜 늦게 클거야. 최대한 늦게 미래에 갈 거야.
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한 승준의 머리색은 파랑색이었다. 혹시라도 파랑을 보면 내가 떠오를까봐. 그리고... 파란 털을 가진 토끼는 흔하지 않잖아? 승준은 파랗게 변한 머리카락을 보며 다짐했다. 이번에는 절대 자신의 청춘을. 가슴 아리게 사랑했던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W. 웨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