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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세상은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느닷없이 떠오른 기억처럼.

 

 

 

 토요일 아침. 어제는 해가 쨍쨍하더니 변덕이 심한 하늘은 하루 만에 비를 뿌려댄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5월의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과제가 아닌 개인적으로 밖에서 풍경화를 그리려 했던 계획이 무산됐다. 아직 눈꺼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잠을 떨치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하루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일정 하나가 비어버리자 급격히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가라앉기 직전인 기분을 전환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만히 앉아 방 전체를 훑던 시선에 요즘 거리를 두었던 책상이 담겼다.

 

 요 며칠 사용하지 않았다고 그새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옳거니, 너로구나. 목표를 발견하자 몸은 바로 반응했다. 잠옷으로 입으려 두 치수 크게 구매한 베이지색 맨투맨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책상 앞에 섰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쌓여있는 군것질의 흔적들이 보였다. 딱히 자각은 없었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밥이 아니라 편의점 식품들을 자주 이용했나 보다. 집 앞 편의점의 브랜드 로고가 박힌 비닐의 양이 두 손에 모아 쥐기에는 조금 버거웠다. 그렇게 두어 번 정도 방 밖에 쓰레기통을 왕복했다.

 

 쓰레기들 밑에 가려져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로에게 짓눌려 있는 소설책과 전공서적들을 구출해주었다. 하나둘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고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갈 즈음 최근에 다시 읽으려 꺼내두었던 소설책이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다. ‘월요일이 없는 소년’, 여덟 번의 토요일을 반복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음, 얘는 일단 위 칸에 둬야겠다. 책상 왼편, 제 눈높이보다 한 뼘 정도 높은 책장은 자주 읽거나 읽을 예정인 책들을 위쪽에 두는 게 꺼내기 좋았다. 이 책 역시 위에 꽂으려 했으나 다른 책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 잠시만 책장 위에 올려두려고 했다. 어차피 금방 꺼낼 거니까 괜찮, …응? 책장 위로 뻗은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발꿈치를 들어봐도 정체를 알아내기엔 키가 조금 모자랐다. 쳇. 하는 수 없이 꺼내서 확인해야 했다. 좀 더 팔을 뻗어 물체를 잡아 당겨보니 꽤 오래된 듯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살살 털어내니 조금씩 본모습을 보였다.

 

 

 

 5년 전에 멈춰있는 밝은 청록색의 다이어리. 이런 게 있었나? 보자마자 의문이 든 것은 당연했다. 2014년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해였고, 필요 없는 건 금방 치워버리는 성격에 5년이나 지난 물건이 남아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다이어리를 쓴 적이 없다.

 

 대충 몇 장을 넘겨보던 나는 침대 위에서 고이 충전되고 있던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나만큼 혹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지도 모르는 사람, 지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

 

 

“유토야 잠깐 나와줄 수 있어?”

 

 

 

 

 

*

 

 집 근처 작은 카페 안. 나는 유토를 불러냈고, 어제까지 밤을 새웠을 게 분명한데도 유토는 내 부름에 쉽게 응해주었다. 뭐에 쫓기듯 급한 마음에 대충 씻고서 옷매무새만 다듬고 우산을 챙겨 먼저 카페에 도착했다. 자리를 잡은 지 5분 정도 지나자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유토가 들어왔다. 카페 안을 한 번 둘러본 유토는 창가에 앉은 나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왔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을 알았는지 유토가 띄우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 있었어?”

 

 “…유토야 나, 이런 걸 찾았는데.”

 

 

 

 

 여태 두 손으로 꾹 쥐고 있던 다이어리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내 움직임을 따르던 시선이 다이어리에 닿자 유토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째서? 역시 너는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민석아.”

 

 

 “응.”

 

 

 

 다이어리에서 다시 나에게 옮겨진 시선. 유토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너, 이게 뭔지 기억나?”

 

“…….”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면 굳이 널 불러낼 필요도 없었겠지. 처음 발견했을 때, 그리고 주황빛 조명 아래서 유토를 기다리며 한 번 더 살펴본 다이어리에는 5월 말부터 12월까지 약 반년 정도의 메모가 있었다. 그 외 다른 페이지들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쓰여있는 글씨체의 주인은 나였지만 그 속의 기억은 내 것이 아니었다.

 

 

 

 

*

 

예상과 다르게 유토에게서도 이렇다 한 답을 얻지 못했다. 어느새 비도 그쳐 하늘엔 마른 먹구름만 가득했다. 급하게 달려갔던 발걸음이 지금은 실망감에 휩싸여 한껏 무거워졌다. 몸 안에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 오늘은 더 움직일 기운이 없다. 짐을 털어내듯 신발을 아무렇게 벗어 정리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치우다 만 책상 위에 다이어리를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여전히 낯선 다이어리를 빤히 바라보다 몸을 세워 기록이 시작된 5월이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하얗게 비어있는 다른 칸을 지나 시선이 멈춘 곳, 28일. 작은 정사각형 안에 반듯한 글씨로 꾹꾹 눌러 쓴 글자, ‘교실에서 첫 만남’. 다이어리 속 단편의 기억들은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과거의 내가 첫 만남을 메모까지 해둔 걸까. 그런 사람이 왜, 지금 내 기억 속엔 없는 거지?

 

 

‘민석아’

 

 

…뭐지. 낯선 목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쳤다. 나와는 또 다른 미성. 목소리가 생소한 것에 비해 이름을 부르는 호흡이 자연스럽다. 주변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었나. 누구지. 유토는, 당연히 아니고. 효진이 형? …아냐 느낌이 다른데. 까만 글자 위를 손으로 쓸어본다. 머리가 복잡했다.

 

 

 

‘기억, 하지 마’

 

‘제발.’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왜 잘 지내던 사람을 흔들어요?

 

한 번 자각해버린 빈틈이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나갔다. 애를 써 막아보려 해도 다른 틈을 발견할 뿐이었다. 나는 찾아야 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답답함에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덮여 드리워진 어둠이 지금의 머릿속과 비슷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멍하니 있기를 한참, 옷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한 번 울리고 멈출 줄 알았던 진동이 길게 이어졌다.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니 효진이 형의 이름이 띄워져 있다.

 

 

“형이 무슨 일이에요?”

 

-너 오늘 찾은 다이어리 말이야.

 

“무슨… 아 혹시 유토가 말해줬어요?”

 

-그래. 너…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

 

“전혀요. 제가 쓴 건 맞는 거 같은데….”

 

-후, 결국 찾아냈구나.

 

“네?”

 

 

아무것도 아냐. 효진이 형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지금 너한테 없는 기억, 찾고 싶어? …네. 찾고 싶어요. 왠지 모르겠는데 찾아야 할 것 같아.

 

형 저 좀 도와줘요.

 

애절하기까지 한 마지막 대답에도 전화 건너편에서는 답이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앞으로 견뎌야 할 무게를 알려주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한울고등학교.

 

“우리 학교는 왜요?”

 

-잃어버린 기억을 알고 싶으면 거길 찾아가 봐.

 

 

피곤함에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목적지는 의외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손끝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지만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가보는 게 좋겠지? 가만히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 책상 위에 놓인 다이어리를 다시 챙겼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꼭 찾아야겠어? 지금까지 잘 지냈으면서?

 

“이미, 알아버렸잖아요.”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르는 게 나은 기억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저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알아요. 근데, ”

 

-…….

 

“별거 아닌 기억 같지가 않아요.”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그래요. 유토도, 형도 이 잃어버린 조각이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 맞죠. 정말 찾지 않길 바랐다면 끝에 끝까지 침묵했을 두 사람이니까. 여전히 말이 없는 효진이 형에게 유토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달라 부탁한 뒤 전화를 끊었다.

 

돌아가는 시곗바늘, 과거로 향하는 길. 자꾸만 심장이 뛴다. 불안일까 기대일까.

 

 

 

 

 

*

 

나는 전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갑자기 맞벌이를 하게 된 부모님 대신 할머니가 계신 전주에서 2년을 보냈다. 한 번은 도시를 벗어나 보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이기에 친구를 만들기 힘들겠다고 각오했지만, 그곳에서 효진이 형이랑 유토를 만나게 된 건 행운이었다. 전학 후 가입한 미술부에서도 다른 학생들과 교류 없이 혼자 다니던 내게 둘은 먼저 다가왔다. 여태 만났던 사람들과 달리 반응이 없는 내게 짜증을 내거나 뒤돌아서지 않고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항상 나를 사이에 끼워놓는 둘에게 나도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었고, 서로 맞는 부분도 많았기에 세 명이 자주 붙어 다녔었다. 여러모로 나를 챙겨준 사람들.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외로움에 사무쳐 더 자신을 감추고 살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잡념 빠져 있다 보니 커다란 창밖으로 지나쳐 가는 풍경이 회색빛 빌딩에서 점점 추억 속의 것으로 바뀌어 간다. 벌써 낮은 건물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지역이 달라서 그런가. 겨우 비가 그친 서울과 다르게 하늘이 맑았다. 무슨 시간 여행이라도 하는 기분이네. 묘하다. 사실 도착하기까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그동안 교통이 많이 발달하긴 한 모양이다. 얼마 안 걸리는 거 알았으면 더 빨리 와 볼 걸 그랬다.

 

역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미리 검색해봤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버스 노선을 살폈다. 역 앞 정류장에서 102번 버스 타고 스무 정거장, 이라고 했지. 기차로 여기까지 온 시간이랑 비슷하겠는데…. 타야 하는 버스는 많던 사람들이 반 이상 빠지고 나서야 도착했다. 오래 서 있어 삐걱거리는 다리를 달래가며 올라탄 버스 안에는 승객이 꽤 있었지만, 듬성듬성 빈 자리가 있어 앉을 수 있었다. 이내 버스가 출발했고 나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내리쬐는 햇살에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정차 벨소 리에 눈이 떠졌고 혹시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을까 싶어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운전석 뒤쪽 스크린을 보니 다행히 이번에 멈추는 정거장이 학교 앞이었다. 곧 버스가 멈춰서자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내렸다. 바로 옆에 교문이 보였다. 예전엔 붉은 벽돌이었는데. 이제는 흰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칠해진 학교가 어색했다.

 

학교 건물로 들어가자 보이는 교무실과 2층에 1학년 교실들을 망설임 없이 지나쳐 3층까지 올라왔다. 복도에 서자 1반부터 저 멀리 10반까지 늘어선 팻말들이 보인다. 교실을 하나씩 지나가며 한 교실 문 앞에 섰다.

 

2학년 3반. 전학 오고 나서 배정받은 반이었다. 역시 시설이 조금 좋아졌나.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가 문 앞에서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아 저기 내 자리였는데. 그때의 담임선생님은 조금 특이한 분이셔서 학기 초에 자리를 정하고 1년 동안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나는 운 좋게도 뒤쪽 창가 자리였기에 만족스러웠지만, 교탁 바로 앞에 앉았던 친구는 불만이 많았지. 공부를 열심히 하던 아이도 아니라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과거 내 자리였던 곳으로 향했다. 책상이며 의자며 다 바뀌어서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도 자리에 앉았을 때 보이는 시야만은 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거 같네. 집에 가기 싫은 것도 있었고, 그림 그리기에는 학교가 편해서 거의 매일 방과 후에 남아있었다. 드물게 야자도 없는 학교가 우리 학교였기에 7교시가 끝나고 종례마저 모두 마친 5시 이후가 되면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한 학교엔 나 혼자만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라. 그림만이 내 전부였던 그때.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 자체가 내겐 탈출구이자 행복이었다.

 

 

쾅.

움찔.

 

아 뭐야 진짜 놀랐어… 환기 때문에 열어둔 창문과 내가 들어오면서 열었던 문 사이로 바람이 통하자 교실 문이 닫힌 듯했다.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너무 급하게 고개를 돌렸는지 현기증이 일어 눈을 꾹 감았더니 다이어리를 찾았을 때 들었던, 누구의 것인지 모를 그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너 여기서 뭐 해?

 

 

창가에 불어오는 초여름의 바람은 슬슬 더위를 데려오기 시작해서 시원하기보단 미지근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제법 높은 톤의 목소리가 차분한 침묵의 공기를 가르고 들어왔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텅 빈 교실이 아니라 민석의 입장이었다. 하얀 백지 위에서 움직이던 민석의 손이 삐끗하며 검은 선이 길을 벗어났다. 뭐야, 단 한 번도 이 시간에 누가 남아있던 적이 없었는데. 속으로 짜증을 삭이며 경로를 이탈한 선을 지우고 다시금 움직임을 이어갔다.

 

집에 안 가?

 

자신의 질문에 돌아오는 답이 없자 한 번 더 악의 없는 물음이 날아왔다. 민석은 계속 손을 움직이며 그냥 무시해버릴까 고민했지만, 차라리 원하는 것을 주고 빨리 보내버리는 것이 자신에게 더 좋을 거라 판단해 손톱이 짧게 깎인 단정한 손으로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목소리가 들려온 교실 뒷문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갈 거예요. 조금 있다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모르는 얼굴이었다. 남한테 관심이 많은 타입인가?

 

 

“그래? 근데 그전에 한 질문은 답 안 해줄 거야?”

 

 

…보면 모르나. 다시금 연필을 쥐려던 손을 책상 밑으로 내려 두 손끼리 맞잡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처럼 말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탁한 한숨이 민석의 입술로 새어 나왔다.

 

 

“ 그림, 그려요.”

 

“뭐 그리는데? 나 옆에서 구경해도 돼?”

 

“아니요.”

 

 

아, 깜짝이야. 기척도 없이 옆으로 다가온 침입자의 목소리가 가까워 민석은 꽤 놀랐지만, 겉으로는 그저 움찔하는 정도에 그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 스케치를 이어나가려는 손을 눈치챈 침입자는 작게 웃었다. 너 고양이 같다. 그 말을 들은 민석의 손이 또 한 번 멈춰 섰다. 이번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탁, 소리가 나게 책상 위에 연필을 내려놓고 찌푸린 시선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허리를 숙인 채 민석을 바라보고 있는 눈과 제대로 마주쳐버렸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쪽팔리게 말까지 더듬고. 덕분에 침입자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아니 그렇잖아. 잔뜩 가시 세우고 낯선 사람 경계하는 게 딱 고양이 같은데?”

 

“…보통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게 맞죠.”

 

“그런가?”

 

“네.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친한 척한다면 더.”

 

“음… 그럼 지금부터 아는 사이하자. 나는 이창윤이야, 3학년이구!”

 

 

사람들과의 관계가 익숙지 않은 민석에게 침입자, 아니 창윤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민석은 일반적인 관계를 쌓는 것조차 제 바로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 같다고 느끼는 타입이었다. 사람들은 낯가림이 심한 민석이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조금 문을 열어볼까 하면 이젠 지쳤다며 돌아서서 가버렸고, 남겨진 민석은 힘겹게 풀어놓은 잠금장치들을 또다시 잠가야 했다.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젠 민석이 버티기 힘들었다.

 

그렇게 꼭꼭 닫혀있던 마음을 창윤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

 

으… 머리야…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방금 떠오른 사람이 내가 기억 못 하고 있는 사람인 건가? 잠깐이지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기억의 잔해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직 한 곳밖에 돌아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한참을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었을까.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아. 이제 다시 출발해볼까, 기억의 흔적을 찾아서. 가방에 넣어둔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두 번째 메모가…, 여깄다.

 

‘5월 31일.’

‘미술실에서’

 

 

 

보통 학생들은 토요일에 학교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다는데 나는 참 열심히도 들락거렸던 것 같다. 매주 오기엔 경비 아저씨의 눈치가 보여 2주에 한 번은 미술실에 들렸다. 미술부 선생님은 본인이 들고 다니면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며 자주 들리는 내게 열쇠를 맡기셨다. 덕분에 나는 출입이 자유로워졌고 시간이 날 때면 미술실에 박혀있는 일이 많았다.

 

미술실은 1층 왼쪽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옆 옆에는 학생부실이 있었는데 당시 학생주임 선생님이 엄한 편이었기에 학생들은 괜히 잘못 걸릴까 봐 오기를 꺼렸더랬다. 걸릴 것 없는 나조차 눈앞에서 뵈면 위축되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는 자주 지나치다 보니 선생님과 친해졌고 그렇게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아무렇지 않아졌지만.

 

생각보다 미술실 안은 내가 학교에 다닐 때와 변한 게 별로 없었다. 교실 중앙을 비우고 주위를 둘러싸듯 놓여있는 의자와 이젤들. 뒤편에 자리한 석고상들도 그대로. 놓여있는 7개의 의자 중에서 한 곳을 골라잡아 앉으며 옆에 가방을 내려두었다. 여기서 유토랑 효진이 형을 처음 만났었지. 넷이서 여기를 아지트처럼 사용했었다. 다이어리에 가장 많이 등장한 장소도 이곳.

 

어라, 내가 왜 넷이라고 했지?

 

눈앞이 하얘지며 또 다른 기억의 조각이 문득 떠오른다.

 

 

 

 

/

 

오늘은 효진이 형이 친구 한 명을 소개해 준다며 우리를 불렀다. 형 친구 나랑 유토 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요? 농담처럼 던지자 형이 괘씸하다며 머리를 쥐어박는다. 아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때렸는데 그럼. 우리의 유치한 모습을 바라보던 유토가 웃는다.

 

 

“유토 너어, 웃지마.”

 

“내가 내 마음대로 웃지도 못해?”

 

“암튼 둘이 나 괴롭히려고 나랑 친해졌지?”

 

 

흥이다. 근데,

 

 

“효진이 형! 형 친구는 언제 와요?”

 

“곧 올 거야. 얘가 원래 좀 잘 늦어.”

 

“안녕! 늦어서 미안! …어?”

 

 

미술실 문을 확 열어 젖히며 나타난 효진이 형의 친구는 저번에 교실에서 마주친 사람이었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효진이 형이 그를 타박하려다 내게 꽂히는 시선에 의아했는지 아는 사이냐고 물었고,

 

 

“응, 알아!”

 

“아니요.”

 

 

우리는 동시에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너네 코미디 찍냐? 유토나 형이나 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시무룩해지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하냐며 억울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난 어이가 없을 뿐이다. 며칠 전에 처음 봤는데 그럼 아는 사인가…. 내 얼굴을 본 효진이 형은 뭔가를 알아챘는지 여전히 뾰로통해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 말했다.

 

 

“이창윤 너 또 혼자 들이댔지.”

 

“들이댔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역시나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보다. 나와는 정반대의 타입. 내가 모른다고 한 게 그렇게 억울했는지 효진이 형에게 나와 있었던 일을 털어놔 봐도 형에게서는 네가 들이댄 거 맞네. 라며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한참이나 찡찡대던 그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유토 옆으로 피신한 내게 다가와 눈을 반짝인다. 놀란 나는 유토에게 바짝 붙었고, 그는 효진의 친구인 이창윤이라며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유토와 빠르게 악수를 하더니 내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제 진짜 아는 사이 맞지?”

 

 

대답을 기다리며 내게 향해 있던 그의 해맑은 얼굴이 효진이 형의 매서운 손길에 아래로 푹 꺾였고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어떡해. 효진이 형 손 엄청 매운데. 뒤통수에 손을 얹더니 뒤를 홱 돌아보며 짜증을 낸다. 애 앞에서 쪽팔리게! 형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이번엔 유토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나는 김민석이에요. 잘 부탁해요, 창윤이 형.”

 

 

그에게 문을 열어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 문을 처음 두드린 그때부터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낯섦에 겁을 먹어 알지 못했을 뿐. 이창윤은 김민석이 스스로 세운 벽을 무너뜨리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 뒤로 우리 네 명은 함께 있는 일이 많았다.

 

 

“효진이 형! 창윤이 형이 또 괴롭혀요!”

 

“야 이창윤, 내가 애 좀 괴롭히지 말랬지.”

 

“와, 나 억울해. 애교 보고 싶다고 한 게 왜 괴롭히는 거야!”

 

 

참나, 저한테 애교 맡겨놨어요? 효진이 형- 진짜 형밖에 없어요 사랑해요! 야 김민석! 너 얻다 대고 사랑한대!! 어디긴요. 내가 젤 좋아하는 효진이 형한테 한 건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가시 세운 고양이같던 옛날 김민석이 좋았어…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러고 싶냐? 네 완전! 방과 후 교실에서 책을 읽던 효진은 민석과 창윤의 요란한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충 한마디를 던져주곤 52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을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그때쯤 문을 열고 들어온 유토 역시 이렇다 한 반응 없이 두 사람을 피해 효진의 근처에 의자를 빼 앉았다. 교실 안에서 이리저리 도망치고 쫓아가는 둘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지 신경도 안 쓰던 효진은 유치한 말싸움이 벌어지자 그제야 칠판 쪽에 서 있는 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니네 사랑싸움은 제발 나 빼고 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내가 지겨워 죽겠어, 아주. 민석이 너도 자꾸 이창윤 질투하는 거 보고 싶다고 나 이용하지 말고. 맞아 그건 인정. 옆에서 유토가 맞장구를 친다. 쟨 뭘 또 덧붙이고 있어.

 

 

“아 효진이 형, 제가 언제요!”

 

“뭐야, 민석이 형이 질투하는 게 좋아서 그랬던 거야?”

 

“아니거든요!”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도 창윤이 형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으, 진짜 막무가내라니까. 내 말을 가뿐히 무시한 형이 씩 웃는다. 뭐, 뭐야…. 왜 그렇게 웃어요. 전 형이 그렇게 웃을 때가 제일 불안하거든요… 어느 순간 시야에 가까이 다가온 형이 보이고, 내 목덜미와 어깨를 붙잡은 손길이 느껴지고, 볼에 닿은 형의 말랑한 입술의 온기가 전해온다.

 

 

“아. 야, 이창윤!”

 

“와… 창윤이 형 저질이에요.”

 

 

나는 그 상태로 굳어버렸고 귀에는 만족스럽다는 듯한 창윤이 형의 웃음소리와 기겁한 효진이 형의 짜증, 유토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다른 말이 없었어도 형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연인이 되어 있었다.

 

 

 

 

*

 

눈앞에 빛이 점멸하며 나는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현재의 미술실이 보인다.

 

…….

 

떠올랐다. 내가 잊어버린 사람,

 

이창윤.

창윤이 형.

 

내가 왜 형을 잊고 있었지? 내가 어떻게 형을 잊을 수 있어? …그래서 찾고 싶었나. 그냥 넘어갔어도 될 다이어리 하나가, 내 전부인 사람의 기억이라서. 손등에 물이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던 걸 그제야 자각한다. 눈에 고인 눈물이 한 방울씩 중력에 이끌리고 있다. 소리가 나진 않았다. 무언가에 틀어막힌 듯 소리가 밖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어째서 형이 내게서 지워진 거야?

 

 

“형. 우리 형, 창윤이 형 어디있어요…?”

 

“…….”

 

 

대답 좀 해봐요. 그 사람 나를 두고 대체 어디로 갔어요.

 

 

 

 

 

/

 

…누구세요?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장난 치는 거야? 잘 놀던 민석이 이상한 말을 한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말했지만,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민석의 어조에는 정말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담겨있었다. 처음 빈 교실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던 때처럼. 주변을 살피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가 무서웠다. 다시 내게 닿은 그 눈빛에, 언제나 나를 보며 웃던 네가 없다. 민석이의 손을 잡으려 하니 뒤로 물러나 버린다. 누구시냐니까요!

 

12월의 겨울, 우리는 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학기 말이라 다들 한결 느긋해졌고 급할 것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허나 불행은 예고없이 나타나는 법이었다.

 

 

 

“이창윤!”

 

“…효진아 김효진. 민석이가, 나를 못 알아본다? 내가 누군지… 모른대. 나는 그냥, 장난치는 줄 알았거든?”

 

“민석이 어딨어.”

 

“근데, 아니더라. 진짜였어…. 더 웃긴 건 너도 기억하고 유토도 기억하는데… 딱 하나만 몰라. 나만, 기억을 못 해….”

 

“그게 말이 돼? …너 일단 정신 차리고. 민석이는.”

 

“방에….”

 

 

나를 두려워하는 민석의 반응을 더 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김효진을 불러야 했고 고맙게도 곧바로 우리 집에 와주었다. 내 전화를 받았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지 안다. 어제까지 아무 이상 없던 아이가 기억을 잃었다니, 그것도 오로지 제 연인만을. 나도 아직 믿기지 않는데…. 누가 들어도 헛소리처럼 들릴 이야기였지만 효진은 맥없는 내 목소리에 심각함을 느꼈는지 민석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이 떨리고 호흡이 가쁘다. 손이 차가워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민석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민석이 있을 방을 쳐다봤다. 차라리 거짓말이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나와서 효진과 둘이서 준비한 장난이었다고. 많이 놀랐냐며 내게 와 안겼으면 좋겠다. 너라면 그 어떤 장난을 쳐도 다 용서할 수 있으니까. 제발.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지 마.

 

 

 

달칵.

 

조용하던 집 안에 문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효진의 옆에 쭈뼛 거리며 서 있는 민석이 보인다.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작은 희망을 품고 김효진을 쳐다봤지만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닿고 싶어. 내가 다가가려 하자 민석이가 움찔 놀란다. 나는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갔다간 뒷걸음치는 너를 보게 될까 봐.

 

 

“창윤아 우리 일단 병원에 가보자.”

 

“…….”

 

“어디가 아픈 건지, 뭐가 문제인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상황을 겪고 있는 네가 걱정된다.

 

 

“…나랑 가면 불안해할 거야. 민석이는 네가 챙겨.”

 

 

고개를 끄덕여 보인 김효진은 민석이에게 너무 겁먹지 말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너는 알겠다며 웃어 보인다. 내가 아닌 김효진에게. 이제 가자. 나는 그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먼저 등을 둘렸다. 민석에게 보인 첫 뒷모습이었다.

 

 

 

 

 

/

 

…혹시, 망애증후군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김효진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서핑하다가 우연히 본 적은 있었다. 근데 그 병이 지금 왜 언급되는 건데. 효진의 얼굴을 살핀 의사는 대부분 모르는 병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환자에게 발병한 망애증후군은 무언가를 계기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는 병입니다.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다시 잊어버립니다. 원인을 특정 지을 수 없고 학계에도 몇 없는 케이스입니다. 그 때문에 현재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이고요. …죄송합니다.

 

의사가 착잡하단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그를 보던 창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방법이… 없어요? 네? 방법이 없다구요… 그게 말이 돼요?!”

 

“야, 야 이창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만해!!”

 

“민석이가 기억을 찾을 방법이 없다잖아!”

 

“너 이러는 거! 밖에 있는 민석이한테도 들릴 거라는 거 몰라?”

 

 

절망적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창윤을 모르는 김민석이라니. 어떻게 이래…. 형체를알 수 없게 깨진 화분, 바닥에 떨어진 책들. 내가 부린 난동으로 엉망이 된 진료실을 거침없이 벗어났다. 뒤에서 나 대신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뒤처리를 하는 김효진에겐 미안했지만 지금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내겐 중요치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건너편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있던 민석이가 보였다.

 

 

“…그러니까 그쪽, 아니 형…이 내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거죠?”

 

“…….”

 

 

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네가 잠시 잊고 있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답할 기운이 없었다. 더 큰 이유는 지금 입을 열면 울음과 함께 나도 모르게 원망이 새어 나올까 봐. 네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왜 나를 모르냐며 따지게 될까 봐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누구에게라도 뱉어내지 않으면 내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그때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김효진이 나왔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그냥요.”

 

“이창윤. 넌 진정 좀 됐어?”

 

 

어느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석이의 정수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김효진에게 말을 전했다. 김효진이 민석의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굽힌다.

 

 

“민석아.”

 

“네, 형.”

 

“네가 불편하면, 창윤이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창윤이도 그걸 원하고.”

 

“아…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너는 그대로다.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남을 배려하는 김민석은 똑같은데, 그 안에서 이창윤의 존재만 사라졌다. 지금의 난 네게 말 한마디 건네본 적 없는 남일 뿐이다. 그런 내게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넌, 끝까지 착해빠진 아이구나.

 

한숨만 쉬는 김효진과 어색하게 웃고 있는 민석이. 바닥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창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우리 사이의 공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눈치만 보는 아이가 안쓰럽다. 그래. 넌 원래부터 사람과의 관계를 두려워했었지. 앞으로 기십 번은 마주하게 될 너의 두려움에 떠는 눈빛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그때마다 효진과 유토를 부르고 또 기다리며 나에게 거리를 두는 너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이창윤은 김민석 한 사람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려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뿐이라.

 

 

“효진아.”

 

“…왜.”

 

“민석이 데리고 먼저 집에 들어갈래?”

 

“너는.”

 

“난 좀만 있다가 갈게. 먼저 가라.”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김효진은 알겠다며 민석이를 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순순히 일어나 효진을 따라가면서도 자꾸만 나를 돌아보는 민석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둘의 그림자가 복도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흐윽……”

 

 

가까스로 참아내던 울음이 새어 나왔다. 다리를 접어 양팔로 끌어안고 그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옷에 스친 왼쪽 손등이 따갑다. 깨진 화분 파편에 맞았었나 보다. 아파. 너무 아파. 나는 손등의 고통을 핑계 삼아 울었다. 집으로 돌아가 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웃어줘야 하는데 마음은 이미 뇌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다.

 

 

 

“이창윤 씨.”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한 채 한참을 울고 있으니 의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

 

“안으로 들어오시죠.”

 

 

멍하던 머리에서 모든 사고가 멈췄다. 지금, 민석이를 고칠 방법이 있다는 거지…? 힘이 빠진 손이 바닥에서 미끄러진다. 몇 번에 시도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진료실로 몸을 던지듯 들어서자 벌써 자신의 자리에 가 있는 의사가 건너편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 한다. 삐걱거리는 몸으로 앞에 놓은 의자에 앉아 의사를 바라봤다.

 

 

“말씀드렸다시피 망애증후군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지우는 병입니다. 그러니까… 환자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이창윤 씨에 관한 기억은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디까지나 조치일 뿐입니다.”

 

“그럼, 민석이는요. 민석이는 죽을 때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요?”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의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 의사잖아, 고치려는 노력 정도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평생 사랑하는 사람도 기억 못 할 민석이는 불쌍해서 어떡하라고…. 속이 답답하다. 가슴을 주먹으로 쳐봐도 풀리지 않는다. 아직도 어수선해 보이는 진료실 안을 다시 뒤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의사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의사로써, 마지막까지 권해선 안 되는 방법입니다만….”

 

“그게 뭔데요. 뭐든 상관없으니까 말해주세요.”

 

“지금까지 가장 확실한 건…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병이 낫는다는 겁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민석이가 나으려면. 앞으로도 사랑이란 걸 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한다.

 

 

 

아무런 말 없이 병원을 뛰쳐나왔다. 의사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돌아갈 곳을 잃은 기분.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구든 답 좀 해주실래요. 왜 나에게, 민석이에게. 이리 갑자기.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어 모두가 길을 건너는데도 초점 잃은 눈으로 서 있을 뿐이다. 초록 불이 깜빡이기 시작했을 때 난 발을 내디뎠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아직 절반 정도가 남았다. 발걸음이 몇 번이고 멈칫거렸지만 억지로 떼어냈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었다. 널 만나 행복했고, 내 행복은 오로지 너의 행복이니까. 하지만 넌 네 잘못이 아닌 것도 네 탓으로 돌리곤 했다. 내가 죽어 기억이 돌아온 네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널 위한 일이 뭔지 모르겠다.

 

 

 

집 앞에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심호흡도 해보고 마음먹고 문고리를 잡았다가도 손에 힘을 줘 돌릴 수가 없었다. 아마 내 기척을 느낀 김효진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반나절은 더 그러고 있었을지도.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긴장하고 있었는데 민석이가 잠들었으니 몸에 힘 좀 풀라는 말에 허탈해졌다. 괜히 쫄았네 이창윤. 헛헛하게 웃어버리고 우리는 약속한 듯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말, 해야겠지.

 

 

“김효진.”

 

“왜.”

 

“효진아.”

 

“왜 그러는데.”

 

“우리 민석이, 이 병이 안 나으면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한대.”

 

“…야. 애초에 민석이가 다른 놈 좋아하는 거 두고 볼 수나 있어?”

 

“글쎄다. 나도 못 볼 줄 알았어.”

 

“근데 왜 그런 말을 하냐.”

 

“어차피 내가 옆에 없다면, 다른 사랑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민석이 옆에 없어. 너 말고 있을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오늘 의사에게 따로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확인된 치료법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여기까지 말했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겠지. 그래서 말인데 효진아, 부탁 하나만 하자. 그런 미친놈 바라보는 눈빛으로 보지 말고. 평소 짓던 웃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웃어? 제정신이야 너? 진짜 돌았냐? 어?!”

 

“쉿. 크게 말하지 마. 민석이 깨면 어떡해.”

 

“네가 지금 제대로 돌았구나. 민석일 사랑한다는 놈이 그딴 생각을 해?”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 걸 어떡하냐.”

 

 

나도 많이 고민한 거라고…. 병을 고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 고치기만 하면 나 때문에 힘든 건 잠깐일지도 몰라.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금방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시선을 떨구고 자신에게 말하듯 읊조리는 목소리. 효진이와 나 자신을 함께 설득하는 중이었다.

 

 

“나 민석이 이딴 병으로 더 길게 힘들게 하고 싶지않아.”

 

“내일. 놀러가자 우리.”

 

“마지막으로.”

 

 

 

유토야 우리 지금 어디가? 오랜만에 놀러. 하긴 맨날 미술실에만 있었지 어디 놀러 간 지 오래됐구나. 근데 유토야 왜 표정이 어두워? 효진이 형도 그렇구.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민석과 대답 없이 걷기만 하는 둘.

 

 

“ 형? 유토야?”

 

“…민석아 우리 오늘 놀 때 창윤이도 같이 있을 거야.”

 

“음… 괜찮아요. 사람은 많을수록 좋죠!”

 

“힘들겠지만 오늘만 잘 대해줘.”

 

“저 괜찮다니까요.”

 

 

근데 왜 오늘만이에요? 한 가지 의문이 있었지만 효진이 횡단보도 건너편에 보이는 창윤을 부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민석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창윤은 손을 흔들어 준다. 조금 이른 시간 때문인지 건널목에 서 있는 건 네 명뿐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민석이 앞서 걷는다. 신났는지 가벼운 발걸음이 횡단보도의 흰 부분만을 밟아간다. 넓어진 보폭으로 당연하게도 뒤에 있던 둘과는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는 창윤. 민석은 반 이상 넘어오고 이제 막 유토와 효진이 중간쯤 건넜을 때, 창윤은 자동차 엔진소리를 들었다. 좌측을 쳐다보자 하얀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고 당황한 창윤은 미처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민석에게로 달려갔다.

 

끼익-

쿵.

 

 

“민석아!!”

 

“창윤이 형!”

 

 

차보다 민석을 감싸 안은 창윤이 빨랐다. 하지만 충돌을 피할 순 없었다. 사고를 낸 승용차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금 시끄러운 엔진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민석이 밟으며 지나온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도로는 두 사람의 피로 빠르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둘에게 다가온 유토와 효진은 할 말을 잃었다. 사고 직전, 창윤이 민석을 제 품에 감싸 안으며 몸을 돌린 덕분에 민석은 찰과상만 입은 정도로 보였다. 문제는 창윤의 상태였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자꾸만 눈에 들어가려는데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고 눈꺼풀만 깜작거린다. 자신의 몸이 으스러졌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민석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창윤. 의식은 잃었지만 일단 괜찮아 보였는지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쿨럭, 야… 119. 컥… 119 불러.”

 

“어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너 눈 감지마. 정신 차리고 있어!”

 

 

아직 진정하지 못하고 눈물만 매단 유토와 효진에게 창윤은 검은 피와 함께 말을 내뱉는다. 그제야 구급차를 부르는 둘을 보다가 다시 민석에게로 눈을 돌린다. 우리 민석이 많이 아프겠다. 형이 제대로 못 지켜줘서 미안해. 형 가기 전에 민석이 얼굴이나 한 번 만져보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주네…. 다음생에 만나면 형이 먼저 알아볼게. 넌 나중에 알아채도… 괜찮아…

 

창윤의 눈이 점점 감겨간다.

 

 

“이창윤 눈 감지 말라고!!”

 

 

 

민석아.

 

앞으론 조심히 다녀야 해.

 

오늘처럼 옆에서 지켜줄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대로 나 기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사랑도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야 해.

 

우리 다음 생에 만나서 다시 사랑하자.

 

 

 

…사랑해.

 

 

 

 

 

*

 

“그 추운 겨울에, 이창윤은 구급차가 오기도 전에 눈을 감았고. 그 멍청한 놈의 소원이 이루어진 건지, 한 달이나 지나서야 깨어난 넌…”

 

“형을… 기억하지 못했구요….”

 

 

난 창윤이 형의 사진 앞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홀로 떠난 당신은 얼마나 외로웠나요. 기억하지 못한 나를 보며 얼마나 괴로웠나요. 바보 같은 사람. 그냥 살아가지… 나 같은 거 그냥 내버려 두고 잘 살지, 왜 그랬어요? 내가 영원히 기억 못 할 것 같았어요? 다시 떠올리게 됐을 때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요? 자기 생일에 그렇게 가는 사람이 어딨어…. 나 때문인데. 형이 스물넷에 다가서지 못하고 열아홉의 이창윤으로 멈춰있는 게 모두 내 탓인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내가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아니요… 창윤이 형을 잊어버렸다는 게 화가 나서 그래요.”

 

“너도 사고를 당한 입장이었으니까. 너무 자책하진 마.”

 

“창윤이 소원 들어줄 거니? 다른 사랑하며 행복하라는 말.”

 

“그럴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아직도 형을 사랑하는데 누굴 만나요, 제가. 그 사람한테도 민폐일 거예요.”

 

 

물에 흠뻑 잠긴 눈으로 웃었다. 당신을 만나러 갈 때까지 다음 생에 당신과 나눌 사랑을 그릴 테다. 형보다 내가 먼저 알아볼 거예요. 이번엔 내 차례니까. 형은 가만히 있어요, 또 먼저와서 들이대지 말고. 알겠죠?

 

 

 

 

 

5년이란 시간을 거꾸로 되돌았던 나의 시계는 다시 제 방향을 달리기 시작한다.

 

그에게로.

 

 

 

 

 

 

 

 

 

※합작 후기※

 

안녕하세요. 어라입니다!

우선 분량조절도 실패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글 내에서 나온 학교는 가상의 학교에요. 이름 짓기 힘들어서 아무 단어나 데려왔네요… 그리고 쓰다보니 자꾸 길어지는 통에 개연성을 조금 먹어버렸습니다…(?) 첫 합작참여라 긴장도 되고 지각할까봐 머리 싸매고 마감했어요… 그래도 존잘님들과 함께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네요! ‘사랑하게 될 거야‘ 에서 시간과 기억을 포인트로 잡고 시작한 글인데요, 마감 다 치고 보니 노래에서 조금(많이) 벗어난 것 같지만…. 두 사람이 부디 다음생에서도 사랑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 저희 같이 션운이랑 운른해요^^ )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외전으로 다시 만난 창윤이와 민석이의 모습을 보고싶어요.

모든 참여진분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최님! 이렇게 옾페스 합작을 열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고 고생 많으셨어요:)

 영휴의 시간 

W. 어라

Orginal-ONF | Piano - Luna Piano - WeMust Love (Piano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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