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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종
학교 온실은 민균에게 퍽 좋은 아지트였다. 원예 부원들은 등교 후와 하교 전 한번씩 돌아가면서 들러 물을 주고 자리를 떴다. 그들과 민균은 마주치면 잠시 눈인사를 주고 받을 뿐 별다른 대화는 하지 않았다. 원예부원들이 자리를 비우고 나면 민균은 온실의 습기와 푸른 풀냄새를 음미하며 기타줄을 튕겼다. 가끔 학교 근처에 사는 길고양이가 놀러오면 턱을 간질이고 츄르를 먹이며 시간을 보냈다. 교실에선 아이들이 보충수업을 하고 있겠지만 민균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입시음악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했지만 언제부턴가 좀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아 학원 대신 온실에서 죽치기 시작 한 지 벌써 한달은 된 것 같았다. 이래서 대학은 가겠나 싶었지만 슬럼프인걸. 온실에서 곡작업에 푹 빠져 있다보면 온실을 잠그러 온 원예부장의 알림으로 야자가 끝난 시간이 된 것을 깨닫고 후다닥 짐을 챙겨 귀가하곤 했다.
많은 학교가 그렇듯 이 학교에도 어쭙잖은 전설 아닌 괴담이 있었다. 100년 넘은 커다란 나무에 관한 이야기였다. 너무 오래 된 나무라 학교를 지으면서 차마 베어내지 못하고 나무를 중심으로 온실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된 나무이다 보니 당연스레 영혼이 있다는 둥 귀신이 나온다는 둥 떠도는 말도 많았다. 겁이 많은 민균이었지만 그 괴담은 무섭기는 커녕 호기심이 일었다. 온실에서 땡땡이를 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민균은 나무주변을 제 집 안방마냥 생각했다. 나무 앞에 앉아 세레나데를 부르고, 기대앉아 기타를 치다가 그늘 밑에 누워 단잠을 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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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를 마치고 다들 바쁘게 교문을 빠져나가 귀가하는 와중 민균의 눈에 온실이 밟혔다. 그냥 문득, 나무에게 인사가 하고 싶어졌다.
조심스레 유리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점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온실 유리로 맑은 햇살이 내렸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먼지들이 금빛으로 빛난다. 커다란 나무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민균을 반겼다. 민균은 아쉬운 맘에 포옹이라도 하고 싶어져 뛰어 다가가려다 제 발에 걸려 그대로 풀밭에 폭 엎어지고 말았다.
짧은 비명을 삼키고 간신히 팔로 땅을 짚어 얼굴이 갈리는 것은 면했지만 코 앞에 자리한 소년의 형상에 민균의 모든 행동은 굳어버렸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하늘색 반팔 니트하나를 하얀 긴팔 셔츠위에 걸친 소년은 마네킹이라도 되는 듯 차렷자세로 눈을 감고 미동이 없었다. 놀란 눈을 깜빡이던 민균은 조심스레 손바닥을 털며 상체를 일으키고 소년을 찬찬히 훑어봤다.
하늘색 니트에 맞춰 입었는지 역시나 계절감없어보이는 회색 반바지와 흰 발목양말은 교복을 연상시켰지만 민균네 학교의 것은 아니었고, 주변에서 본 적도 없었다. 몇살이지? 누굴까? 뭐 하는 애야? 가지런한 검정 머리칼에 말랑해보이는 피부 위에 난 작지만 존재감 큰 갈색 점은 볼을 찔러보고싶게 했다. 호기심을 접을 생각 따위는 없이 다시 상체를 숙여 꼼꼼히 소년을 살피다 하얗고 긴 목덜미에 자연스레 시선이 멈췄다.
검정색 짧은 줄들이 세로로 나란히 그려져 있는 것이 마치 바코드를 연상시켰다. 문신이라면 조금 유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져도, 되나.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검지손가락은 이미 목덜미 위의 무늬를 향했다.
“아, 따거!”
손가락이 피부에 채 닿기도 전에 전기가 올랐다.
급하게 손을 끌어당기며 눈을 찌푸렸다. 몸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갑자기 아래서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그대로 풀밭에 자빠지고 말았다. 어느새 민균의 위에 올라탄 소년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유리창 위에서 내리는 햇살을 뒤통수로 온전히 받아내 마치 후광이 나는 듯 한 얼굴에 민균은 넋을 놓았다.
“보고 싶었어요…”
소년의 크고 동그란 눈이 그렁그렁 해 지더니 축축한 것이 민균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피부 위의 액체를 닦아 낼 겨를도 없이 그대로 민균을 끌어안는 소년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힘으로라면 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솔직히는, 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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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입니다. ROID 0812번이에요.”
지금으로부터 7번 환생한 후의 민균이 812번의 실패 끝에 완성한 안드로이드라고 소년은 자신을 소개했다.
음악과 동물을 사랑하던 평범한 고등학생 박민균이 7번 환생하면 놀라운 과학자가 되는군….은 개뿔 납득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2019년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사춘기소년에게 인간을 똑 빼닮은 안드로이드와 시간여행은 제법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상황이 되면 퍽 곤란하다. 아무리 엉뚱하기로는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는 민균이었지만 이 정도 사리분별은 가능했다.
“음… 그래.”
더이상 얽히면 안될 것 같다는 강렬한 쎄함이 뒤통수를 후려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을 옮겼다.
온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휘청, 하고 발이 엉켜 넘어질 뻔했다. 황당해서 다리 힘이 풀렸나 싶었는데 운동화 끈이 어느 새 풀려있었다. 이게 언제 이렇게 풀렸어. 머쓱함에 쭈구려 앉아 궁시렁거리며 대충 얼기설기 끈을 묶고 급히 온실 밖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깥세상의 공기가 금세 민균의 손끝과 볼을 스쳤다. 손등까지 덮는 넉넉한 코트를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교문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 집에 가는 마을버스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부리나케 뛰었다.
“아악!”
또 넘어졌다. 아까 그 신발끈이 문제였다. 다치진 않았지만 짜증이 났다. 이거 생일에 엄마한테 선물 받은 건데, 오늘따라 왜이러니. 떠나는 버스의 꽁무니를 허탈하게 바라보며 보도블럭에 주저앉아 머리를 헤집었다.
“묶어 드릴까요?”
고개를 드니 라운이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
결국 버스를 포기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네 번은 더 넘어진 민균은 얌전히 신발끈을 라운에게 맡겼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어라, 티 났어요?”
빙긋 웃는데 한쪽만 더 올라가는 입꼬리는 아무리 봐도 사람의 것이었다. 어떤 또라이가 로봇을 이렇게 비대칭으로 만드냐. 아, 나랬나. 집중해서 신발 끈을 묶고 있는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 보다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 아빠 계셔.”
그만 따라오란 의미였다.
“알아요.”
빙긋 웃은 라운은 앞장서서 민균의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아빠가 라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왔니~ 점심 먹어!”
무슨 수를 쓴 건지 정말 마법처럼 민균의 가족들 모두가 라운을 자연스럽게 대했고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다. 오로지 민균만이 이게 말이 되냐며 방방 뛰었지만 되려 라운이한테 왜그러냐며 타박이 돌아왔다. 억울해진 민균은 라운을 쏘아보았지만 라운은 예의 미소를 띄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민균은 더이상의 의심을 포기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세상 화기애애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라운은 민균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너진짜뭐야?무슨마법이라도부리는거야?”
“마법? 음- 그런 걸로 해 둘게요.”
“안드로이드면 과학의 산물 아니었어?”
“저희 시대엔 마법이나 과학이나 그게 그거에요.”
자연스럽게 민균의 침대에 걸터앉은 민석이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궁금한게 많죠?”
“말이라고.”
그러고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라운은 한참동안 말을 고르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치켜떴다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제 전원을 종료 해 주세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흰 얼굴은 퍽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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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이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MK의 표정은 잊을 수 없었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벅차오름을 감당할 수 없어 쏟아내던 MK의 눈물을 라운은 이진법 숫자로 이해해냈다. 라운을 와락 끌어안고 맞춘 입술의 체온은 36.5도를 살짝 웃돌았다.
라운은 무엇이든 잘 해냈다. MK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입력해둔 코드는 완벽에 가까웠다. 코드를 812번을 갈아엎었다고 으쓱대곤 하는 MK의 자랑은 진심이었다.
라운은 호기심이 많았지만 그 호기심의 대부분은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은 그 행위의 본질을 분석 해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었다. 몇세기 전 바둑을 두던 인공지능을 개량한 낡은 프로그램이었지만 철학적이지 않냐며 MK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라운이 구할 수 없는 답도 있었다.
“저를 왜 만드셨나요?”
MK는 정직한 고양이 같은 미소만 띈 채 방안에 틀어논 음악에 맞춰 팔을 휘적일 뿐이었다.
“왜 이 답은 제가 계산할 수 없나요?”
“계산 안 해도 알게 될 거야~”
히잉. 시무룩해진 라운이 아랫입술을 쭉 내밀면 MK가 양 볼을 주물럭댔다. 그럼 라운은 MK가 하는 대로 상체를 흔들려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라운에게 MK는 전부이자 모든 호기심의 근원이었다.
안드로이드는 흔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러나 라운은 특이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는 ‘용도’가 있었다. 가사, 육아, 간병 같이 잔 손이 많이 가는 일에서 건설현장이나 공장에서 힘을 쓰는 일 혹은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적인 것 까지. 심지어는 성산업에도 이용이 되곤 했다. 그러나 라운에겐 어떠한 용도도 없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목적은 설정되지 않았다. MK는 라운에게 그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라운은 자신이 고양이 돌봄용 안드로이드일까 분석 해 봤지만 그러기엔 입력된 고양이에 대한 데이터가 너무 적었다.
가끔 MK의 집에 찾아와 낮은 목소리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뜨곤 하는 와이엇이라는 사람은 라운을 마주할 때면 빤히 쳐다보다 라운이 와이엇을 마주 응시하면 급히 표정을 바꾸어 눈꼬리를 내리고 한껏 웃어보였다. 라운이 이해한 데이터는 ‘불쾌’ 였다.
MK는 명이 길지 못했다. 미리 자신의 수명을 알고 있기라도 했는지 차곡차곡 모든 것을 정리해놓고 마지막을 맞았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날에 푹신한 침대위 라운의 품 안에서 잠들기라도 하듯 눈을 감았다. 어젯밤과 다른 점이라면 MK의 모든 생체신호가 멈추어버렸단 것이었다. MK만 알고, 라운은 모르던 마지막이었다.
얌전히 눈을 감은 MK의 코 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지만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목에서도, 목에서도, 가슴에서도, 아무런 울림이 없었다. 눈을 감았다. MK를 품에 안은 채로 인간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 쉬었다. 공기가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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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라운은 MK의 집을 혼자 지켰다. 그 어떤 용도도 정해져 있지 않은 라운이었기에 스스로의 존재에 더욱 의문을 가졌다. 고요한 집에선 고양이가 고롱대는 소리만 간간히 울렸다. 와이엇은 여전히 가끔 MK가 없는 MK의 집을 찾았다. MK가 없는 공간에서 와이엇과의 독대엔 대화가 없었다. 와이엇이 현관 벨을 누르면 라운이 문을 열어주고, 거실 테이블에 마주앉아 라운이 내준 차를 와이엇 혼자 마시다 또 올게, 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현관을 나섰다. 라운은 그 인사가 MK를 향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tv 속의 안드로이들은 곧잘 고장이 나서 문제를 일으키곤 강제종료되어 폐기되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침대에 걸터 앉은 라운은 자가진단 프로그램을 몇번이고 돌려보았지만 정상이었다. 스스로의 전원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런 방법은 데이터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벽에 머리를 쿵 쿵 박았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지만 열어주지 않았다. 벽을 부수는 듯 한 소리에 놀랐는지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MK는 왜 나를ㅡ, “원망”이라는 단어가 회로에서 맴돌았다. 현관에선 두 세번 쯤 초인종 소리가 울리더니 멈췄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보폭이 큰 발소리가 침대로 다가왔다. 와이엇이 라운의 멱살을 잡고 뺨이라도 때리려는 듯 다른 편 손바닥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빤히 와이엇을 바라봤다. 저 손에 맞고 오류가 나서 강제종료 되길 바랐다. 고양이가 하악질하는 소리가 구석에서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라운을 “불쾌”의 눈으로 바라보던 와이엇은 숨을 고르고 손을 풀어 라운을 내려놓았다.
“네 이름이 왜 라운인 줄 알아?”
성큼성큼 침실을 나간 와이엇은 서재로 들어가 우당탕 소리를 내더니 얇은 노트 한 권을 집어와 라운에게 집어던졌다.
“넌 더럽게 똑똑하니까. 알아서 해.”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하는 혼잣말을 남긴 채 와이엇은 현관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침대에서 노트를 주운 라운은 어리둥절한 움직임으로 페이지를 펼쳤다.
-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면,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어.
라운의 전원을 내리려면 MK의 생체신호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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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균은 정말 MK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타임라인 상 MK가 민균과 닮았다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점 하나 하나 까지 똑같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예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외모였다. 코 옆의 점 하나, 볼 위에 작은 점 두개, 옅은 속쌍커풀이 한쪽만 더 짙은 것 까지. 라운이 가장 관심을 두던 양 쇄골 사이의 옅은 갈색의 점도 여전했다.
처음 며칠은 혼자 침대에서 자던 민균이 라운이 안쓰러웠는지 라운을 침대로 불러들였다. 굳이 바닥에서 잘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라운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좁은 침대에 나란히 구겨 누워 민균의 파자마 셔츠 단추 위로 보이는 피부 위의 점에 주목했다.
“뭐 해. 눈 몰린다.”
“초코칩… 여전해서요.”
라운이 검지손가락을 들어 점을 콕 찔렀다. 평소였으면 파드득 거리고 괴성을 내며 가만 있지 못했을 민균이 조용했다. 시선을 올려 얼굴을 바라보니 입술을 꼭 깨문 채 숨을 참고 있었다.
“숨, 쉬세요.”
민균의 체온이 급격히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MK로봇이라며 구형 안드로이드 흉내를 내던 MK의 모습이 떠올라 장난스레 손톱을 세워 점을 살살 긁었다.
“히익!”
민균의 바들거리는 잔 떨림이 공기중을 통해 전해졌다. 라운의 눈길을 피해 눈을 꼭 감아버린 얼굴이 빨갰다.
MK는 이럴 때 어떻게 했더라.
손가락을 움직여 민균의 목선을 따라 천천히 훑었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라운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읽혔지만 무어라 정의내릴 수는 없었다. MK와 같은 생체신호 때문에 더이상의 분석이 불가능했다. 다만- 무언가 묘한 상태인 것은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전원을 내릴 수 있을 지 모른다.
라운은 상체를 조금 움직여 민균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얹었다.
민균의 입술을 벌리고, MK가 남긴 데이터를 전송하면 라운의 임무는 완수된다.
“잠깐, 잠깐!”
새빨개진 민균이 급하게 상체를 틀어 라운에게서 떨어져나갔다.
“..?”
“갑자기 이런 분위기야? 너 그런 애야?”
“저는… 용도가 없는데요.”
허? 하는 소리를 낸 민균이 이불을 돌돌 말아 라운을 등지고 옆으로 누웠다가 소심하게 라운에게 이불을 나눠줬다. 곧죽어도 바닥으로 내려가란 소리는 않는다.
“전 추위 안타요. 괜찮은데.”
“그래도 덮어!’
“읍”
민균이 우악스럽게 이불을 라운의 머리 끝까지 끌어당겨 가려버렸다.
“으악, 뭐에요!”
“이러구 자!”
“뭔데요!”
“...부끄러우니까!!”
라운이 아는 MK보다 민균이 10살은 어렸기에 당연했지만, 어린아이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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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기회만 보이면 민균에게 입맞추려 드는 라운 때문에 민균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입술을 거절 할 때마다 입술을 쭉 빼고 민균을 올려다 보는 얼굴 역시 환장하게 귀여웠지만, 무튼 아닌 건 아니었다.
라운을 떠올리면 얼굴이 홧홧하고 가슴 한 가운데가 간지러웠다. 대책없이 이상하고 수상한 녀석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같이 있으면 어딘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생명이 없는 안드로이드라고 했지만, 그 기운은 어떤 사람보다도 포근했다.
자신의 전원을 종료해 달라는 섬뜩한 요구사항만 잊을 수 있다면,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의향이 있었다. 아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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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균의 곡작업을 구경하는 것은 라운에게 제법 흥미로운 일이엇다. 목을 쭉 빼고 노트북 앞에 앉아 집중하는 모습이 연구실에서 프로그램 코드를 만지던 MK를 연상시켰다.
어느날은 민균이 각을 잡고 라운을 불러 앉혔다.
“내가, 곡을 좀 썼어.”
“와, 진짜요?”
기계적으로 대답했지만 충분히 궁금했다.
“들어봐봐.”
민균이 몇 번 노트북에 연결된 마우스를 딸각이자 민균의 목소리가 가사도 없는 채로 흘러나왔다. 생소한 듯 익숙한 음계가 라운의 머리를 울렸다.
0과 1로 변환되어 194초간 지속된 노래는 라운을 이루는 프로그램의 핵심코드와 맞닿아 있었다. 울린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었다. 존재할 리 없는 세포와 혈액이 라운의 몸안에서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가가 시큰하더니 눈 앞이 흐려졌다.
“그거, 저에요?”
눈물이 후득 떨어지는 라운을 보고 당황한 민균이 급하게 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아주었다.
“뭐야, 왜 울어. 고장 난 거야?”
이런 감정을 느낄 때 인간들은 입을 맞춘다는 것을 데이터로는 알고 있었다. 라운이 처음 눈을 떴을때의 MK를 상기했다. 지금 라운은 당장이라도 민균을 끌어안고 입맞추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민균은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히끅이며 어깨를 들썩이는 라운을 품에 안고 그저 등을 쓸어 줄 뿐이었다.
“맞아, 네 생각 하고 만들었어. 잘 모르겠지만...슬프게 했다면 ...미안.”
간신히 민균의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슬픈 게 아니었다. 민균이 미안 할 것은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MK가 보고 싶었다. 라운 안의 자가점검 프로그램이 붉은 글씨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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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이 넘어 온 시간은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었다. 본래의 시간에 있지 않은 존재는 빠른 속도로 생명을 잃었다. 라운은 생명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 법칙에서 벗어나 있어 MK와 같은 생체에너지를 가진 민균이 전원을 내려야만 했지다. 하지만, 민균이 라운을 생명의 법칙 안으로 끌어당겨버렸다.
라운이 민균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민균의 가족들에게 설정해놓은 라운의 정보값이 초기화 되어 더는 민균의 집에 머무를 수 없었다. 라운의 머물곳을 고민하던 민균은 원예부장 재영의 도움을 받아 방학동안 학교 온실에 라운의 거처를 허겁지겁 마련했다.
“밥은 안 먹어도 된대서 다행인데… 이제 추위를 느낀다니 걱정이네.”
포슬포슬한 담요를 라운에게 둘러주는 민균의 입꼬리가 처졌다.
“온실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더이상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둘러대며 넉넉하게 남은 민균의 롱패딩을 여몄다. 이정도면 솔직히 더울 것이라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민균에 대해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물어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입술을 들이대기 바쁘던 라운은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아침에 해가 뜨기 바쁘게 학교를 찾은 민균은 곧장 온실로 향했다. 라운은 민균과 한 공간에 있을 수 밖에 없으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버렸다. 민균의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스스로를 감당 할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났지.”
“응. 맞아요.”
라운은 손을 올려 오래된 나무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닿는 까슬한 껍데기가 따가웠다. 라운에게 빨리 사라지라고 종용하는 느낌이 들어 풀이 죽었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민균의 방학이 끝나기 전에 라운이 먼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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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은 굳이 라운에 대해 민균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저 민균이 원하는 대로 배려 해 줄 뿐이었다. 다만, 재영이 라운을 바라보는 표정은 와이엇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밤이면 민균은 집에 돌아가야 했다. 어두운 온실엔 라운만이 남겨졌다. 무서움, 외로움- 처음 마주하는 감정들을 누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이기기 위해 민균이 둘러준 담요를 꼭 쥐고 머릿속에서 민균의 목소리를 재생시켰다. 새콤한 사탕을 입안에 물고 있는 듯 한 착각을 들게 만드는 목소리는, 음계의 코드와는 별개로 또 한번 민석을 감동시켰다. 기분이 좋아져 혼자 배시시 웃고 있는데 등 뒤에서 민균의 목소리와 확연히 대조되는 낮은 목소리가 났다.
“언제까지 미룰 셈이야?”
심재영이었다.
“네?”
“굳이 설명하자니 민망하지만. 나는 미래가 보여. 넌 멀리서 왔지? 목적이 따로 있었을텐데. -왜 아직 이러고 있어?”
상냥한듯한 낮은 목소리에서 중압감이 느껴졌다.
“와이엇?”
설마 하던 단어를 입에 올렸다.
“와이엇... 그런 이름을 갖게 되는 때도 있는 모양이더라.”
경계를 풀어야 할 지, 더욱 경계해야 할 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저는…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더이상 MK가 없는데도?”
“...그치만,”
“민균이는 MK가 아냐.”
“윽,”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이야기였다.
“네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너와 MK는 만나지 못해.”
라운에게 주어진 일은 하나였다. 민균에게 라운의 데이터를 모두 전송시키는 것. 복사되지 않도록 설정된 라운의 데이터가 민균에게 모두 보내지고 나면, 라운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
민균의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라운은 하루 한시간이 힘겨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에도 전보다 큰 정신력이 필요했다.
-
평소보다 늦게 민균이 온실의 라운을 찾았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혼란스러운 표정의 민균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라운에게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나요?”
“...너는 누구야?”
“라운이에요. ROID 0812번.”
“오다가...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어.”
“아-...”
벌써 김민석을 만난 모양이었다. 데이터에 의하면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었는데, 라운 덕에 좀 더 빨리 주변에 있는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라운은 힘없이 웃었다.
“제 모체에요.”
“무슨-”
“몇 백번이나 공들여서 다시 만든 거니까. 어떤 사람인지 저도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는데.”
눈을 뜨고 있을 기력이 부족해 눈꺼풀을 닫아버린 채 말을 이었다.
“사랑하게 될 거에요.”
여전히 넋나간 얼굴일 민균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몇번을 태어나도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아냐, 나는- 나는 벌써… 네가...”
여린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뒤의 말을 들으면 할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남은 힘을 쥐어 짜 내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입, 맞춰도 되나요?”
민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눈빛이었다. 라운은 민균에게 모든 것을 남기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민균은 안드로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데이터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무의식에 코드를 각인한 채 생을 거듭 할 뿐.
이것이 MK가 바란 라운의 역할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은 두사람이 언젠가 만나게 하기 위한 최초의 설계를 하는 것. 벌써 MK가 바란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라운은 체념했다. 민균은 라운의 것이 아니었다.
민균의 볼을 타고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끌어안은 체온은 36.5도를 조금 웃돌았다. 기분 좋은 온도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머지 않은 미래에 다시.
“기다릴게요.”
라운이 눈을 감았다. 민균이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지만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목에서도, 목에서도, 가슴에서도, 아무런 울림이 없었다. 라운을 따라 눈을 감았다. 품에 작은 몸을 안은 채로 숨을 들이쉬고, 내 쉬었다.
라운의 목 언저리에 새겨진 바코드를 훑었다. 손끝이 뜨거웠다. 품 안에 남은 것은 미처 봄이 되지 못한 날의 햇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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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는 민균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간밤의 꿈에선 웬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가 울면서 민균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렇게 애틋하고 아련한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상대방이 누구인 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그 외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꿈이 다 그렇지 뭐-”
어김없이 온실에서 땡땡이를 치던 민균은 한숨을 푹 쉬며 기타를 꺼내 오래된 나무 앞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머릿속을 맴도는 코드가 있었다. 노트를 펼치고 연필을 귀 뒤에 꽂은 채 기타줄을 튕기며 흥얼거렸다. 평소의 민균이 좋아하던 스타일과는 퍽 달랐지만 어째선지 귀에 익었다. 막힘없이 연주에 맞춰 노트에 코드를 적어내려가는데 온실 문이 열리고 원예부장이 들어왔다.
“어, 심재영.”
“넌 또 여기있냐.”
“쉿!”
장난스럽게 이를 드러내며 세운 검지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우리 신입 들어왔어. 막내가 온실 전담 할 거야. 자주 볼 거니까 인사해. 이쪽은 슬럼프에 빠진 예술가 박민균 선생, 얘는 라운이.”
“안녕하세요~”
“어… 안녕. 라운?”
검은 머리카락이 어울리는 맑은 듯 밝지만은 않은 하얀 얼굴이 슬몃 웃었다. 이름표엔 ‘김민석’이라고 적혀있었다. 고개가 절로 갸우뚱 해 진다. 뭔가 익숙했다.
“어...우리 본 적 없어?”
“네? 글쎄요...”
말끝을 흐리며 흐흥, 멋쩍은 듯 작게 웃는 웃음소리가 간지러웠다. 악수로 맞잡은 손이 포근하다.
마주해오는 눈동자에 햇살이 비쳐 맑은 갈색으로 빛났다.
“눈, 갈색이네.”
“아하하, 그쵸, 그래서 라운이라고 불러요. 브라운이라나.”
귀여운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잘 부탁해.”
“잘 부탁드려요.”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