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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

W. 피치

1.기류

 

 

창윤은 가만히 눈을 껌뻑였다. 자꾸만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제 시야에겐 도통 무신경했다. 평소대로라면 눈을 뜨자마자 기지개를 켜고 커튼은 걷어냈을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정신이 든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얌전히 누운 자세를 유지했다. 창윤은 이내 손을 뻗어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잠깐의 회상도 상쾌한 듯싶어 더욱 궁금해졌다. 뭐였을까, 그건. 꽤 아쉬웠는지 결국 다시금 눈을 감아 너를 그려냈다. 그 동그란 얼굴이 숨을 훅 부는 것만 같아서, 단숨에 벌떡 일어나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혼자 중얼댔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

 

 

창윤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가 평소 좋아하는 감자칩을 스무 개가 넘게 쌓아놓고 하나씩 뜯어 파삭거리며 먹고 있었다. 창윤은 자신의 앞에 문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랬기에 그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를 잔뜩 벙찐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먹던 감자칩을 힘없이 툭 떨어트리며 말이다. 그 남자는 자신만큼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았다. 창윤은 다짜고짜 제 볼을 세게 꼬집었다. 명백히 꿈이었다. 그 남자는 피식 웃으며 창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꿈일까요? 당혹스러운 표정이 다 드러난 것도 모르고 침착한 척 대답했다. 그, 그럴걸요! 비록 말은 더듬었지만.

 

 

창윤은 그제서야 자신의 환경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파스텔 톤 벽지와 작은 원목의자 2개, 싱글사이즈 침대 하나, 그리고 내가 쌓아둔 과자 탑이 전부인, 작은 방인 듯싶었다. 뒤늦게 그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사실 쭉 그가 궁금했다. 이유는 그저 단순히 잘생겨서. 내가 그려낸 이상형 같은 건가? 그는 확실히 이상형에 가까웠다. 드물게 봐 온 하얀 피부부터 동그랗고 총명한 눈까지 창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 왜 그렇게 봐요, 나 신기해요? "

 

 

" 예뻐서요. 네? "

 

 

" 네? "

 

 

그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고 창윤은 얼굴이 화끈거려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그에게 입 맞출까 고민했다.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은 그가 몇 년씩 짝사랑한 다른이와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감정이란 게 파랗고 시시했다. 동시에 속에서 점점 끓어오르는 게 흥미로웠다.

 

 

" 미안해요. "

 

 

" 웃은 거? "

 

 

" 남의 꿈에 멋대로 들어온 거. 나는 감자칩 잘 안 먹어요. 이거 그쪽 꿈이야. "

 

 

" 아... "

 

 

창윤은 순간 아찔했다. 결국 꿈속에 사는 사람일까 싶어 줄곧 입 맞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도 그저 꿈꾸는 사람이구나. 실존하는 사람일거라곤 추호도 생각 안 해봤는데, 너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나. 큰 실수 할 뻔했네. 아니지, 이게 전부 꿈인데, 애초에 남의 꿈에 들어온다는 게 말이 돼? 나,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는 거 아니야?

 

 

" 저기요! 그.. 그러니까.. "

 

 

" 말씀하세요. "

 

 

" 안아주세요! "

 

 

" 네? "

 

 

 

-

 

 

 

 

 

떠오른 마지막 장면에 창윤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나, 왜 그랬지?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론 그 남자가 저를 안기도 전에 깨버린 꿈이 퍽 무심했다. 창윤은 가만히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고작 꿈결에 스쳐간 당신은 어째서 나를 이리도 차오르게 하는지. 벅찬 심정을 주체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도 너를 볼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만 같아 속으로 몇 번이고 염원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름, 꼭 알아올 것!

 

 

 

 

 

 

 

 

2. 꽃가루

 

 

 

" 저.. 안아줄까요? "

 

 

" .. 네? "

 

 

창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점차 입가에 번져가는 미소를 막을 길은 없었다. 다시 만난 것부터 믿기 어려웠다. 오늘 낮부터 죽자고 신을 찾은 보람이 있었던 건지. 창윤은 쭈뼛대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렇지 않아도 적잖이 좁은 방이 그날따라 넓게만 느껴졌다. 한 발자국만 더 걸으면 그에게 안길 수 있었다. 하지만 창윤은 내심 나머지 한 발자국은 그가 다가와주길 바랐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눈치가 빨랐다. 다정스레 자신을 안아오는 것에 여태 느끼지 못했던 뭔가가 자꾸 피어올랐다. 피어난 것은 물을 줄 틈도 없이 자라났다. 창윤은 머리가 하얘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거, 보통 사랑이라고 하나?

 

 

" 있잖아요. 나, 질문 하나만 하게 해줘요. "

 

 

" 뭐가 궁금할까. 그래, 한 번 해봐요. "

 

 

" 이름. 우리 이틀이나 봤는데, 이름도 모르잖아요! "

 

 

" 고작 이름? 김 민석 이라고 해요. 그쪽은? "

 

 

" 이 창윤이요! 고작 이름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

 

 

" 다짜고짜 안아 달라 길래, 질문은 얼마나 엉뚱할까 싶어서요. "

 

 

" .. 그쪽이 더 이상해. 남의 꿈에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하다느니,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안아달라는데 안아주고. 이렇게 선뜻. "

 

 

" 그러면서 안겨있는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그리고 이름, 이제 아는데? "

 

 

" 말꼬리 잡긴... "

 

 

" 놓을까? "

 

 

" .. 아니. 우리, 내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

 

 

" 낮에 나 보고 싶었어요? "

 

 

" 원래 그런 말 스스럼없이 하는 타입인가. "

 

 

" 아니요. 그러니까 고개 들지 마요. 나도 낯간지러워. "

 

 

" .. 사실은 오늘 하루 종일 생각했어요. 보고 싶다고. 다시 잠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우유 데워먹었어. "

 

 

민석은 창윤을 토닥이며 작게 웃었다. 귀여운 생각을 했네. 우유 2잔만 데워먹고, 내일도 만나요. 민석은 보지 못했다. 품에 안긴 창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는지 말이다. 창윤이 민석의 세상에 저와 닮은 꽃은 없었으면 하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은 각자의 삶에서 눈을 떴다.

 

 

 

3. 기억

 

 

 

민석은 기지개를 켰다. 크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며 커튼을 걷어냈다. 날이 무척 좋아 홀린 듯 창문을 열어 아침공기를 맞았다. 어쩐지 요 며칠 잠에서 깨면 괜히 기분이 가벼웠다. 무언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자꾸 드는 것만 빼면 제법 완벽한 아침들이 이어졌다. 보다 더 강한 봄내음이 풍겨서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찬물로 얼굴을 헹궈내니 그마저도 금세 잊었다.

 

 

민석의 자전거는 어느새 학교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코끝에 익숙한 향이 불어온다. 이제 정말 봄인가. 살랑 이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자전거에서 내리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초코우유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내려놓고 지갑을 꺼냈다. 열자마자 보이는 사진 속 맑은 웃음의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자 잠깐 애달픈 심정이 들었다. 점원이 저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한참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처럼 겨울이 다하는 시간이 오면, 더 그리워졌으니까.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의 봄은 당신이니까.

 

 

-

 

 

 

 

4. 여름

 

 

 

" 나, 할 얘기가 있어. 사실 꿈에서 깨면 널 모두 잊어버려. 너도 그래? "

 

 

 

창윤은 눈이 커져서는 민석의 손을 꼭 쥐고 되물었다. 몇 번을 되물어도 민석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 해왔다. 창윤과 민석이 만난지는 벌써 한 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매일 밤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고 아픔을 토닥이거나 사사로운 장난을 치는 것이 다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했다. 창윤은 꿈에서 깨도 온통 민석을 떠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주 걷던 길에 꽃이 피어나면 그 향을 민석이라 부르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땐 민석과의 동행을 상상하곤 했다. 누구도 몰래 민석을 갈망하는 것이 그에게 봄일테면 기어이 봄이고, 그가 없는 하루는 온전히 텅 빈 공허라 여길 정도였다. 그런 나날을 보내는 것이 자신 뿐이라니, 괜히 울컥 서운함이 끓었다.

 

 

 

 

" 왜 말 안 했어? "

 

 

" 나도 몰랐으니까. 파악하는데 오래 걸렸어. 너를 보면 네가 기억나. 하지만 널 보지 않고서는 꿈을 꾸었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나. "

 

 

" 어쩔 수 없지, 뭐. 나한테 숨기는 거 더 없어? "

 

 

" 없어. "

 

 

민석은 언제나처럼 창윤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지그시 눈을 맞췄다. 겨우 삼켜낸 뒷말을 다시 떠올리면서. 창윤도 하고싶은 말이 있었다. 아니,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도 해로운 말이 있었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서로에게 살며시 입을 맞췄다. 무엇보다 불명확하고 누구보다 짙은 관계를 그들은 전부라 칭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안겨있으면, 금방이라도 깨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이 조금 가신다. 마음이 깊어갈수록 꿈의 잔상이 더욱 남는다. 아침이 밝아오는 소리에 서로의 귀를 막아주었다.

 

 

-

 

 

" 김민석, 넌 연애 안하냐? "

 

 

" 바빠서.. 라고 하면 안 믿을거지? "

 

 

" 아직도 그 사람 못 잊은 거야? 그, 네 지갑 속 사진에 있는 그 사람. "

 

 

" 글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여전히 전부야. "

 

 

" 너도 참 너다. 첫사랑을 이렇게 오래 안고 있는 경우는 드문데. "

 

 

편의점 테라스에 앉아 초코우유를 들이켰다. 우습고 귀여운 제 모습이 오늘따라 한심했다. 문득 그가 다시금 떠올랐다. 민석 에게 봄이란 인생에 한 번, 14살 때 뿐 이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그이가 담던 벚나무 밑을 지나갈 때, 제 얼굴에 떨어진 벚꽃 잎을 가져간, 아름답기도 한창인 그 순간을 잊지 못해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순애보적 계절을 이어가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주길 바랐지만 어디 사는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한 번 스치듯 본 것이 전부였다. 뭐였더라, 그 이름. 민석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슥 그었다. 완성된 글씨는 이창윤. 이창윤 이었지, 그 이름. 민석은 남몰래 피식 웃어보았다. 올 봄에 벚꽃이 피었던가. 당신은 보았으려나, 한시라도 나를 떠올려주었으려나.

 

 

-

 

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만에 깨어난건지, 머리가 지끈하게 아려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윤은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 발을 딛었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며 비틀거리다 이내 주저앉았다. 창윤은 알고 있었다. 민석을 만난 뒤로 자신이 어떻게 피폐해져 왔는지. 무언가 잘못된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때때로 민석을 만나고 자신의 일생이 새로 쓰여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기도 했다.

 

병원에 가도 그저 감기몸살이라는 모호한 결론만을 주었고, 저 역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일에는 출근을 하다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휴일은 민석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 부족한 잠을 자느라 하루가 온통 지나있었다. 물론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단지 민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뿐 이었다. 이제껏 창윤은 계속해서 늙은 낮과 어린 밤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창윤은 마음을 다잡고 결심했다. 더는 자신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민석과 꿈에서 만나지 않으리라고.

 

 

 

 

 

-

 

 

 

 

 

 

 

5. 낙엽

 

 

 

 

" 그러니까, 만나자고? "

 

 

" .. 응. "

 

 

창윤은 차라리 명랑했다. 나, 더 이상은 꿈에서 널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고, 그러니까 이젠 직접 만나기로 하자고. 맑게 웃으며 말했다. 예상보다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민석이 의아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서로를 위로해준다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여태 단 한 번도 자신들이 무엇하는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니까. 창윤은 민석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물었다.

 

 

" 내가 아픈 건 너도 싫잖아. 응? "

 

 

" .. 그래. 그러자. 만나자, 우리. "

 

 

민석은 창윤의 머리를 쓰담으며 미소 지었고 창윤은 발그레해진 제 볼을 어루만졌다. 민석은 창윤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불쑥 스치는 익숙한 사랑스러움에 차차 창윤의 존재를 알아갔다. 자신의 불, 언제나 혼자 그리다 어느 순간 그을음이 진 그의 잔상. 마음 같아서는 한 시라도 서둘러 창윤과 대면하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저를 사랑이라 불러달라고 아이처럼 조르고만 싶었다. 민석은 착잡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았다.

 

 

 

-

 

 

 

 

 

 

6, 낙화

 

 

 

창윤을 소매를 걷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8시 30분. 약속시간은 4시였다. 꿋꿋한 척 미소 짓던 창윤의 얼굴은 점점 창백히 제 빛을 잃어갔다. 창윤은 민석을 믿었다. 민석이 저와의 약속을 흔쾌히 잡은 것은 깨어나서도 창윤을 기억하리라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4시간이 넘도록 민석을 기다린 것도 그에 대한 마지막 신뢰 때문이었다. 창윤은 울지 않았다. 창윤은 아직 울지 않았다. 시침은 9시를 지나고 있었다. 창윤은 카페를 나왔다. 어두운 거리에서 창윤은 울었다. 결국 쏟아낸 마음이 어찌보면 애달팠다. 끝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제 셔츠를 부여잡고 죽자고 울어댔다. 창윤은 그날 민석을 볼 수 없었다. 기막힌 우연인지, 제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어느 행운인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

 

 

민석 없이 보내는 나날들은 무척 상쾌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햇살이 온전히 느껴졌다. 커튼을 걷어낼 힘도 충분했다. 출퇴근 역시 별 문제 없이 수월했다. 창윤은 빨대를 입에 물었다. 잘근잘근 씹어 다 뭉그러진 빨대 사이로 커피를 쭈욱 빨아 당기다 다시 이를 뗐다. 창윤은 멀쩡히 잘만 숨을 쉰다. 하지만 창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음식을 먹는지 도통 몰랐다.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민석의 뺨에 입 맞추고만 싶었다. 파고드는 상처는 흉터로 번지기조차 고되어 마음을 흘리는 채 방치되었다. 창윤은 고통이 아니라 민석이 절실하다. 민석이 고통이라면, 창윤은 고통이 절실하다.

 

 

-

 

 

 

7. 명목

 

 

 

민석은 가게 문을 밀고 나와 골목 벽돌에 걸터앉았다. 술기운이 뻗쳐 잔뜩 달은 제 얼굴을 어루만지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제 머리를 세게 몇 번 쥐어박았다. 도대체 뭘 잊은 건지. 나는 뭘 잊어버리고 있는 건지. 민석은 지난 이주일간 단 한 번도 이 찝찝한 감각을 털어내지 못하였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싸고 고민해도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말겠지, 싶어 방치한 시간이 14일, 이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

 

 

아야야.. 머리가 지끈거려 급히 찬물을 한 잔 들이켰다. 술도 잘 못하면서 뭘 그렇게 마셨던거야, 나는. 어젯밤 아무렇게나 널부러놓은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방이라도 정리해볼까. 잃어버린 그 사진, 오늘은 나올지도 모르니까. 민석은 허리를 쭉 펴고 앞치마를 둘렀다. 옷장을 열었다.

 

 

겉옷과 상의를 하나씩 개어두다 문득 옷장 맨 위를 발견했다. 먼지털이로 살짝 건드리자 먼지가 훅 불어왔다. 얼굴에 바로 맞자 몇 번 콜록이며 의자를 끌고와 위쪽을 살폈다. 지난 겨울에 사용한 스웨터, 선물 받은 모자, 하얀 상자. 상자? 민석은 의아한 듯 손을 뻗어 상자를 꺼냈다. 먼지 쌓인 상자를 열자 짙은 노란빛의 머플러와 연필 몇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민석은 상자를 떨어트리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타 단숨에 거리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 숨이 턱 끝에서 버벅일 때, 민석은 카페에 도착했다. 작게 중얼거렸다. 있을 리가 없잖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민석은 손에 쥔 사진 한 장을 살짝 구겼다. 퍽 오랜만인 설움이 달갑지 않았다. 창윤아, 이창윤. 알고있어. 너무 늦어버린 것도, 내가 얼마나 무책임한지도. 하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너를 살아왔어. 나는 오직 너였고, 너를 잊어본 적 없었어. 창윤아. 너를 나라고 부를 기회를 줘. 어여쁜 너의 조각을 이제야 찾아낸 나를, 한 번만 모른 척 안아줘.

 

 

 

" .. 김민석? "

 

 

 

창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저 걸었을 뿐인데 유독 신발 끈이 풀린 것만 같은 오늘이었다. 창윤은 운명이라 칭했다. 기어이 민석을 불렀다. 서로 마주친 눈빛은 제멋대로 흔들렸고 변함없이 맑았다. 그들은 무너져 내리고 쏟아졌다. 사랑한다는 말이 들려오진 않았지만 분명 충분히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서질 듯 끌어안고 몇 번이고 울고 웃었다. 스쳐가듯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나칠 수 없었다. 당연하다 불렀다. 꽃이라 바랐다. 봄이라 여겼다. 가장 뜨거운, 여름이라 태웠다.

 

 

 

-

 

 

 

 

 

8. I DO

 

 

 

' .. 민석아. "

 

 

" 응. "

 

 

" 우리가 못 만날 수도 있었을까? "

 

 

" 우리는 만났잖아. 원해도 그럴 수 없었을 거야. "

 

 

" 왜? "

 

 

" 우리니까. 음.. 우리라서. "

 

 

" 하긴, 우린 꿈에서도 만났는데? 차라리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해 봐. 그게 더 쉽게 만나겠다. "

 

 

" 그러게. 우린 아마 다음 생에도 만날 수 있을 걸? "

 

 

" 그랬으면 좋겠어? "

 

 

" 아니. 아까 간식 먹고 설거지 또 안 해 놓은 거 다 봤어. "

 

 

"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너 기다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

 

 

" 으그, 이럴 때만 그때 이야기 꺼내지, 또. 설거지 해놓기 전엔 안 돼. 알았어? "

 

 

" ..뽀뽀 한 번 해. 인간적으로 한 번 해. "

 

 

" 안 돼. "

 

 

" 야, 김민석! 야!!! "

 

 

 

- 운션 I DO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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