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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아이

W. 제린

아르바이트와 전공 공부를 병행하며 바쁜 생활을 할 때, 한동안 들리지 않던 그 아이의 소식이 내 귀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어릴 적부터 바라왔던 꿈을 접고 방향을 틀어 재수를 해 올해 의대에 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아이만은 잘 살기를 바랐는데,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한편으론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한 소식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이, 재수를 했다는 소식이 사실이라는 걸 알려 주듯 지쳐 보이는 눈이, 피곤한 와중에도 여전히 맑고 투명한 눈이, 심지어 나를 향해 웃는 듯 예쁘게 접히기까지 한 그 눈이, 분명 그 아이가 맞음을 알려 주었다.

 

*

 

고등학교 입학식 날, 그 아이는 전교생을 대표해 선서를 했다. 전교생 대표로 이름이 불리자 쪼르르 달려 나가 청아한 목소리로 선서를 하고, 예쁘게 웃으며 뒤로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아이가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고, 나는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입학식이 너무 길어 뒤로 나가 몰래 앉아 있거나 다리를 비틀며 가까스로 서 있었을 텐데, 그 아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입학식을 마치고 한 무리의 아이들을 따라 반으로 가니, 그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우리 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아는 한 모두 총동원해서라도 그 아이와 친해져야 할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고,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 아이는 전교 1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낯을 가리는 나는 그 속에 끼어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반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자진해서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 내 예상과 다르게 그 아이는 반장 선거에 나가기를 거부했고, 도리어 그 아이와 친해지고 싶어 반장 선거에 나갔던 내가 반장이 되어 버렸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에 친구를 하나도 사귀지 못했던 내가 반장이 되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반장이 된 소감을 말하러 교탁 앞에 나가 자연스레 눈을 돌려 그 아이가 있는 곳을 보았다. 그 아이는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눈 때문에, 나는 내 짝사랑이 쌍방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사로잡혀, 발표를 망쳐 버리고 말았다.

 

나는 반장으로서, 아이들을 조금 더 잘 알 필요가 있다는 명분으로,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주로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아이는 책을 읽다가도 내가 옆에 앉으면 잠깐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웃어준 다음, 다시 책에 집중했다. 나 역시 집중하는 그 아이의 모습이 좋아 그대로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책을 읽는 그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릴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계속 그 일을 반복했고 나는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멀리 있는 중학교에서 우리 동네까지 이사를 오는 바람에 아는 친구가 없어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전교에서 1등을 하게 될 줄도, 반장 선거에 후보로 거론될지도 몰랐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처음 이 반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친해지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오글거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아이가 해서 왠지 환상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의 예쁜 눈이 그 환상을 더 아름답게 꾸며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걸 안 이후로 나는 자연스레 등하굣길에 그 아이와 함께했다. 나는 반장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야자에 참여해야 했지만, 그 아이는 학원을 핑계로 야자를 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 아이는 고등학교에 왔으니 야자를 해 보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하고서는 그에 맞지 않게 야자 시간만 되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저렇게 시간을 보낼 바에는 그냥 집에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몇 번이나 그 아이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 아이는 내 말에 따르지 않았다.

사실 그 아이가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있어서 나는 좋았다. 잠든 그 아이에게 내 마이를 덮어 주고 마음껏 얼굴을 구경하는 게 힘든 하루 중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잠든 그 아이의 동그랗게 감긴 눈이 예뻤고, 그 위로 길게 뻗은 속눈썹이 예뻤다. 잠든 그 아이의 얼굴 속 모든 게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내가 그 아이에게 홀려 버린 듯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할 때쯤이면 그 아이는 깨어났다. 그러면 곧 야자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그 아이와 나는 가방을 챙겼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그 아이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아이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마이와 셔츠를 뚫고 내 어깨에 닿는 것만 같아서 나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굳어 버린 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자, 그 아이와 나는 손에 스크류바를 하나씩 들고 하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야자가 끝난 시간이 되면 어둠이 내려앉아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가늠하기도 힘들어지는 그 하굣길을, 그 아이와 나는 꽤 많이 걸었다. 간혹 버스 정류장 몇 개를 지나쳐도, 스크류바에서 녹아내린 빨간 물이 손을 타고 흘러 손이 찐득해져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계속 걸었다. 그 아이와 함께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행복해졌다. 어쩌면 그 아이도 나처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있고 싶었을지도.

그리고 여느 때처럼 스크류바를 들고 하교하다가, 우리는 키스했다. 얼마 먹지도 못한 아이스크림이 녹아 바닥으로 흐르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잠시 동안 세상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로. 어두운 길 위에서 오직 가로등 불빛에만 의지해 첫 키스를 했다. 그 아이가 먼저 부딪혀 온 입술은 그 아이의 의지로 떼어졌다. 나에겐 첫 키스였지만, 그 아이에겐 어떤지, 알 수 없었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아이의 입술은 아이스크림에 의해, 그리고 나에 의해 빨갛게 물들었다. 맞닿았던 두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그 아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리 무슨 사이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우린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그 아이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내 어깨에 기대어 한참을 조잘댔을 그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정적을 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대로, 그냥 집으로 갔다. 무슨 사이? 여전히 우리는, 친구였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지만 우리는 친구였다. 그 아이도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우리는 친구였다. 키스까지 했음에도, 친구였다.

 

그 날 이후로도 우리는 줄곧 친구였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성적표가 나왔다. 두 번의 시험 기간 내내 전교 1등인 그 아이의 옆에 붙어 공부를 해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잘 나온 성적에 감탄했다. 그 아이는 당연하게도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았고, 더불어 한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 모두에서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그런 성적표를 들고도 그 아이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성적표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나를 축하해 줬고, 제 성적표는 구겨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하필이면 그날,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던 우리는 그대로 비를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비에 쫄딱 젖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우리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간절한 듯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들이자마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씻어도 되냐고 묻는 그 아이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옷 중 최대한 작고 여린 그 아이의 몸에 맞을 것 같은 옷을 골라 그 아이가 들어간 곳으로 전해 주려고 문을 두드리자, 그 아이는 급히 문 뒤로 몸을 숨기고 빨개진 얼굴로 옷을 받았다.

내가 씻고 나왔을 때, 그 아이는 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도 머리를 털면서 그 옆에 앉아 그 아이의 눈치를 보았다. 정말 1초가 1분 같고, 1분이 1시간 같은 정적이 흘렀다.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침 삼키는 소리마저 괜히 신경이 쓰여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인가 싶어 아무 말이나 해 보려는 찰나, 그 아이가 내 쪽으로 기대어 왔다. 야자를 끝내고 버스에서 그 아이가 내게 기댈 때처럼, 나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내 샴푸의 향기는 내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리 친구야? 그 아이가 정적을 깨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친구지? 나는 그 아이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 아이에게 할 대답을 고르는 동안,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대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려주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할지 고르고, 말을 꺼내려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입을 맞춰 왔다. 나는 첫 키스 때보다 더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아이가 다시 한 번 나에게 키스를 했다. 친구끼리는 키스 안 해. 그 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는 연애를 하게 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여전히 우리를 친구로 보았고, 우리는 친구인 척을 했다. 아직 방학이 시작되지 않은 학교는 어수선했고, 우리는 그 틈에 끼어 몰래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 아이는 먼저 비밀로 하자고 약속을 해 놓고, 책상 아래로 내 손을 잡아 왔다. 에어컨 바람을 잔뜩 받아 차가워졌던 그 아이의 손이 따뜻해지다 못해 땀이 차오를 때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학교에선 땀이 날 때까지 손을 맞대고 있다가, 하교 후에는 우리 집으로 가 입술을 맞대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입을 맞추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습관이 되어 하지 않으면 허전하거나 이상할 지경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 아이는 제 집으로 가기 전 우리 집에 들르는 것을 당연한 하루 일과로 삼았다. 내 방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들린 것이 아이스크림에서 핫팩으로 바뀔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내 침대에 누워서, 언젠가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글 쓰는 게 좋다고. 부모님은 다른 길을 갈 것을 강요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 아이는 내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 아이의 눈이 너무 맑아 언제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 그 아이의 눈물을 보니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그 아이의 눈물이 보기 싫어 그 아이의 여린 어깨를 내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 아이의 눈물로 내 어깨가 젖어 들어갈 때, 나는 또 한 번 사랑을 느꼈다. 그 아이가 더 이상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슬퍼할 일도 힘들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 아이를 꼭 안았다. 내 품에 안겨 울다 지쳐 잠들어 버린 그 아이를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곧 방학이 시작되었다. 한동안 우리 집에 오지 않았던 그 아이가 붉어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화면에 비친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급하게 방 안에 뒹굴던 셔츠와 바지를 주워 입었다. 내가 문을 열자, 그 아이가 멍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내 침대에 앉은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한없이 울기만 했다. 나 역시 아무 말 않고 그 아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 아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좀 안아줘. 제발. 제발 한 번만. 나는 그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 어깨를 밀어낸 그 아이가 내 셔츠의 깃을 잡아 당겨 잘못 끼워진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그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어깨를 살짝 밀어 침대에 눕도록 했다.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지 이미 침대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지 오래인 그 아이의 위로 올라탔다. 그 아이는 여전히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나 홀로 그 아이의 옷을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땀을 흘리는 것을 보았는지, 그 아이는 슬쩍 엉덩이를 들어 옷을 벗기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힘겹게 그 아이의 바지를 벗겨 내고 다시 얼굴을 들어 그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그 아이는 눈을 감고, 제 몸부터 시작해서 저의 감정, 쾌락,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있었다. 그 아이의 예쁜 눈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주고 그 눈에 입을 맞췄다. 그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그 아이에게 키스했다. 입술을 떼어내면서 그 아이를 보니, 어느새 그 아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기나긴 하루를 보냈다. 마침 그날이 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고, 그것을 기념해 두 분이 여행을 가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아이는 내 침대에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또 한 번 키스하고, 어깨를 토닥였다.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오랜 시간의 정사에 지친 듯 잠들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수시로 관계를 가졌다. 익숙했다. 그 아이가 안아 달라고 한 마디만 던져도 나는 개처럼 그 말을 덥석 물고 순응했다.

 

우리가 많은 얘기들을 나누고, 몇 번이고 입맞춤을 하는 동안, 방학이 모두 지나갔다. 1학년 교실에서 서로 마주보고 웃던 우리는 2학년 교실에서도 손을 맞잡고 서로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2학년 때도 반장이 되었고, 그 아이는 여전히 반장에 관심이 없다며 선거에 출마조차 하지 않았다. 새 학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담임선생님께서는 번호 순으로 자리를 배치하라고 하셨고, 김 씨와 이 씨의 성을 가진 우리는 너무나도 먼 자리에 배치되어 버렸다. 그 탓에 우리는 책상 아래로 손을 잡을 수 없었고, 나는 틈만 나면 그 아이의 자리를 힐끔대는 바람에 선생님들께 자주 이름이 불려 꾸중을 들었다. 그 아이는 내가 저 때문에 지적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나 역시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것보다는 집중하는 그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보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 아이가 나를 봐 주길 원하지는 않았다.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때쯤, 그 아이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아이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 아이는 어두운 낯빛을 띄면서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전에 없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를 가로막는 어색함을 깨지 못한 채로, 내가 독감에 걸려 학교를 빠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문자 한 번조차 보내지 않았다. 내가 집에서 쉬는 동안, 학교는 이미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그 아이는 없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그 아이가 전과를 했다고 했다. 글 쓰는 게 좋다며 울기까지 했던 아이가 왜 이과로 간 것인지,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이기지 못한 것인지, 그 아이가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그 아이가 나를 피한 것에 대한 서운함보다,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이제는 그 아이의 반이 되어 버린 옆 반 교실로 가니, 그 아이는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내가 온 것을 모르는 것인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주지 않았고, 나는 결국 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별했다. 진짜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걸까.

 

그 아이와 나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조차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가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입술을 부딪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한 사이였다는 것은, 이미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우리 둘만의 이야기였다. 반장이라서 항상 많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나와 다르게, 그 아이는 항상 혼자였다. 그 아이와 나는 항상 함께였고, 우리가 많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혼자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생각보다 그 아이를 잘 몰랐던 것 같았다. 죄책감이 들었다.

많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공부를 하려고 해도, 다른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일들은 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미 내 머릿속에는 그 아이 생각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없으니 시간이 느리게 갔다. 그 아이의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하루 온종일 공부만을 하다 보니, 어느 샌가 나는 문과 1등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억겁의 시간 같던 2학년 2학기와는 달리, 3학년이 되자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렀다. 한 번 고개를 돌리니 수능을 치고, 또 한 번 돌리니 졸업을 하게 되었다.

 

수능 이후, 학교에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 아이가 학교에 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등교 시간이 달랐던 건지, 그 아이가 날 피했던 건지, 어쨌든 나와 그 아이는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졸업식 날,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예쁘게 반짝이던 그 눈이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처음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아이의 눈은 또 한 번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예쁘게 웃었다. 그 아이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그 아이가 나를 향해 달려와 나에게 안겼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한 나는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손을 올려 그 아이의 머리를 쓸었다. 여전히 그 아이는 씩씩하지만 여린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게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보다 그저 울기만 하는 그 순간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아이도, 나도 아무 말을 않았지만, 왜인지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곧 그 아이가 내 품에서 빠져 나갔다. 그리고 다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예쁘게 접힌 눈으로 그에 맞지 않게 눈물을 흘리는 그 아이가 너무 예뻐서, 나는 그 아이를 붙잡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기약 없는 만남을 기대하며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다. 매번 내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걸까, 왜.

 

*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분명 나는 버스 창가에 앉아 창문에 기대어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고등학교 졸업식의 그때로 돌아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눈 앞의 예쁘게 웃고 있는 그 아이와, 졸업식 날 예쁘게 접힌 눈으로 울었던 그 아이가 겹쳐 보였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잊었다 생각했던 내 첫사랑이 돌아와 나를 울렸다. 그 아이와 나는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업식 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냥 모든 게 느껴졌다. 그날처럼, 그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에게 손을 흔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느라 이미 내릴 곳을 놓친 지 오래인 나는 그 아이를 따라 내렸다. 이번에도 그 아이를 붙잡지 못하면, 졸업식 때처럼, 그 아이를 놓쳐 버릴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내가 따라 내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날과는 반대로 내가 그 아이에게 달려가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눈꽃이 피어 세상이 온통 새하얗던 그때와는 다르게, 봄꽃이 피어 세상을 따뜻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를 보며 울던 그 아이가 이제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고, 그 아이를 보며 웃던 내가 이제는 그 아이를 보며 울고 있었다. 그때와는 다른 결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또 한 번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나의 자취방으로 달렸다. 우리의 몸은 스물을 넘어선 지 오래였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은 고등학교 1학년 그때 그 마음 그대로였다. 그때는 서툴렀기에 놓쳐 버렸지만,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우리의 추억이 묻어 있는 내 침대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추억을 쌓아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첫사랑의 법칙을 믿어 왔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 아이와 나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첫사랑의 법칙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법칙을 만든 사람에게, 너는 틀렸다고, 나는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첫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그 아이는 영원한 나의 첫사랑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첫사랑의 법칙이라는 건 없을 것이다. 첫사랑은 기필코 다시 만나게 된다. 다시 만나 그때 그 시절 그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정도만 되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감히 정의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첫사랑은, 나에게 그 아이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을 느껴 보고 싶어.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해 하늘만 쳐다보기만 했어.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너만을 바라봐 왔고, 이젠 너도 나를 바라봐 줄 거라고 생각해.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도, 매번 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다 필요 없어. 그것들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어.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내가 너를 다시 만나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아. 낮에도 밤에도 절대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름다운 내 첫사랑. 내 첫사랑, 승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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