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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W.감고

어릴 적부터 적당히, 남들 다 하는 대로, 힘들지 않게 물 흐르듯 살아왔다. 그 결과 잘 갔다고 하기도, 못 갔다고 하기도 모호하게 평범한 4년제 대학에 군대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 뒤로도 평범한 직장에 평범한 취미생활 평범한 연애 결혼 등… 을 겪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제대 후 맞이한 현실은 말로 형용하기도 끔찍하니 생략하자. 집에 있기도 눈치 보이고,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 몸으로 일하자니 그건 약체 이창윤 본인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저 인스타그램으로 남들 어떻게 사는지 염탐하고 가끔 무신사에서 옷을 질러버리는 삶을 쭉 영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도피처(또는 생존수단)로 선택한 것이 9급 지방직 공무원이었다. 고등학생 때 진로희망 칸에 '행정 공무원'을 적어내는 친구들을 보며 그게 무슨 진로냐며 비웃었다. 그때 당시 나는 뭘 썼더라... 아마 사업가였을 거다. 지난날의 패기에 스스로 놀라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서의 반응은 어땠냐 하면... 말로써 내뱉진 않았지만 내 가능성을 의심하는 듯 보였다. 내 하나뿐인 친형 이창선은 대놓고 n년 공중분해 할 생각이냐며 꼽을 줬다. 자식이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냐며 부모님은 공시생의 길을 적극 지원해주셨다. 매달 독서실 비며 밥값이며 휴대폰 요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말했지만 엄마 아빠 형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평범이 아닌 평편하게 살아온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배은망덕한 이창윤은 독서실 비 18만 원을 빼돌렸다. 비상금이라는 명목으로 꽁돈 확보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독서실은? 집 근처 신설 도서관으로 대신했다. 3층 노트북 열람실은 온전히 창윤의 세상이었다.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하고. 이대로라면 순탄하게 초수 합격의 성공을 일구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헛된 망상이었다. 공부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창윤은 행정학개론의 늪에 발목을 잡혀 당장에라도 열람실에서 뛰쳐나올까 생각을 수백 번을 했다. 씨.. 분명 어제 했는데 또 헷갈리네. 휘발유도 아니고 왜 자꾸 기억이 날아가는건지. 고3 때도 이렇게까지 공부하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창윤의 발목을 잡은 건 그것 뿐이 아니었다.

 

"사실 형 옆자리도 좋은데, 그것보단 왼쪽에 있고 싶어요."

"왼쪽이라니... 왜 그쪽에 집착하는 건데?"

"심장이 왼쪽에 있잖아요. 형 심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해서."

"와.. 뭐야.."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대사를 현실에서 치는, 이 동그란 놈이 창윤에게로 데굴데굴 굴러들어왔다. 그러곤 2000년대 귀여니st 인소 대사에 얼빠진 창윤의 턱을 한 손으로 잡고 키스했다. 어이없게도 창윤은 그걸 좋다고 받아내고 있었다. 동그란 애는 남은 손으론 갈 곳 잃은 창윤의 손을 잡았다. 그에 창윤은 깍지를 끼는 것으로 대응했다. 드디어 미쳤구나 이창윤. 완전히 발목을 잡혀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함은, 열람실 터줏대감이 되어가기 일보 직전의 상태인 창윤의 옆자리에 흰색 백팩이 놓일 때부터 시작된다. 다른 자리도 텅텅 비어있는데 하필 부담스럽게 창윤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부터 의심했었어야 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뒤통수 동그란 애는 뭔 속셈인지 굳이 바로 왼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인강을 틀었다. 곁눈질로 모니터링 해본 결과, 저 나이대 학생치곤 진중하게 앉아서 공부만 하다 가길래 더는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한 일주일은 고요하게 잘 지내다가 다음부터 창윤이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거나 등의 이유로 자리를 잠깐 비울 때 책상 위에 뭐가 자꾸 놓여있는 것이다. 청포도 사탕이었다. 처음엔 누가 잘못 놓고 갔거니 해서 먹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매일 쌓여가는 청포도 사탕을 보며, 아마 맞은편 끝에 앉은 여자 분이 준거라고 확신했다. 26년 이창윤 인생에도 드디어 봄바람이 불어오나 했다.

 

오만 김칫국을 다 마신 상태로 다음 날 어김없이 출석했다. 심지어는 웜코튼 향의 바디미스트도 뿌리고 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일부러 자리를 떴다가 돌아왔을 땐, 역시나 청포도 사탕이 창윤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처음으로 그 사탕을 자리에서 까먹었다. 익숙한 청포도향이 입안에서 퍼진다. 음.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이었다. 혼자만의 상상에 심취해 눈을 감고 설탕 덩어리를 음미했다. 이거만 다 먹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하는데 누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헉. 드디어?

 

"점심 안 드셨으면.. 같이 먹을래요?"

"좋아요.... 에?"

 

창윤을 부른 건 끝자리 여자분이 아닌 바로 옆자리 뒤통수 동그란 고등학생이었다. 세상 무해한 얼굴로 물어오는데 차마 거절하기도 뭐해서 일단 수락했다. 그 여자분이 있는 자리를 쳐다보니 창윤에게 눈길은커녕 노트북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응..? 설마. 어색하게 근처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그 고딩이 하는 얘기를 듣다가, 우동 면발과 아까 마신 김칫국을 다 토해낼 뻔했다.

 

"맨날 그냥 두시다가, 드디어 사탕 하나 까 드시길래요."

"말도 안 돼. 여태까지 사탕 두고 간 사람이 너라고?"

 

그러니까 근 며칠간 계속 창윤에게 사탕을 몰래 주고 간 천사.. 아니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김민석이라는 놈이었다. 심지어 고딩도 아니었다. 대학생이란다. 여태까지 혼자 착각한 게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더 쪽팔리는 일은 따로 있었다.

 

 

매일을 혼자 밥 먹다시피 하니 슬슬 외로웠던 참인데, 김민석은 그날 이후 창윤의 점심메이트가 되어줬다. 정확히는 창윤이 김민석의 점심메이트가 된 거로. 12시 반이 되면, 걔는 이젠 대놓고 청포도 사탕을 올려놓는다. 그럼 암묵적으로 일어나 같이 근처 식당가를 돌며 점심을 먹고, 소화를 시킨다는 명분으로 벤치에서 데미소다를 마시며 농땡이를 피웠다. 이게 일일 코스였다.

 

농땡이만 피우면 다행인데, 얘가 자꾸 거슬리는 짓을 해서 창윤을 미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손 크기를 재보자며 손을 은근슬쩍 만진다든지, 귀 연골이 접히느냐며 귓불을 조물거린다든지. 그러면 이상하게 힘이 축 빠지고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김민석이 창윤의 민둥한 입술산을 신기해하며 만지작대던 날. 그리고 창윤이 도톰한 민석의 입술을 칭찬해댔던 그 날. 쪽팔리게 매일 앉던 공원 벤치에서 키스했다. 김민석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창윤에게는 첫 키스였다. 게다가 상대는 창윤보다 5살 어린 남자 대학생.. 이라는 사실에 당황한 나머지 중간에 어깨를 밀어냈다. 밀쳐진 김민석의 동공이 지진이 일은 마냥 흔들렸다..

 

"왜... 왜요.. 하지 마요?"

"어? 아, 아니. "

 

에라 모르겠다, 하며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인생 최고로 쪽팔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인생 최고로 설레는 순간이기도 했다. 처음이 어렵지 나중엔 밥 먹듯이 물고 만지다가 도서관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 후로도 김민석은 꼬박꼬박 청포도 사탕을 바쳤다.

 

"고맙긴 한데 계속 청포도 사탕만 주는 이유라도 있어? 정말 궁금해서 그래."

"혹시 싫은 건 아니죠?"

"아니야. 좋아. 어떨 때 입천장 까지는 거 빼곤, 잘 안 녹아서 오래 물고 있기도 좋더라."

"다행이다."

"응?"

"청포도 사탕은 딱딱하고 크기도 커서, 먹는데 꽤 오래 걸리겠더라고요. 먹는 동안 내 생각 조금이라도 더 해줄까 봐. 그래서 그랬어요."

 

얘는 무슨 말을 이렇게 한담. 한두 번도 아닌데, 무슨 반응을 해줘야 할지 몰라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면 김민석은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형, 나 봐요. 그 다음은 보나마나다. 공부할 때보다 더 열심히 입술을 섞었다. 언제 사탕을 까먹은 건지 민석에게서 인공적인 청포도 향이 훅 끼쳐왔다. 달콤하고 시원했다. 딱 청포도사탕남 김민석 그 자체였다. 이렇게 갑자기 굴러들어온 애가 내 첫사랑이라니, 말도 안 돼. 왜 하필 김민석인지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평범한 삶 연애 결혼 등은 포기해야겠다.

Orginal-ONF | Piano - Luna Piano - WeMust Love (Piano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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