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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W. 땡벌이

완벽한 컴백 첫 무대를 위한 연습은 오늘도 어김없이 진행 중이다. 멤버들의 그 불타는 열정 덕에, 일 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연습실 안은 어느새 습기로 가득해 후덥지근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민석의 낯빛이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어둡다. 본래 민석은 완벽주의자 기질 때문에 연습할 때만큼은 생긋생긋 웃던 얼굴을 잠시 넣어두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안무에 집중하곤 했다. 그게 익숙한 탓인지 오로지 연습에만 열중한 다른 멤버들은 민석의 상태를 전혀 모르는 눈치다. 그러나 분명 그것과는 다른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챈 자, 다름 아닌 재영이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걱정 거리가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빡센 연습 일정 탓에 살짝 예민해진 것뿐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다같이 타이틀 곡 안무를 맞춰 보는 데에 열 올리는 와중에도 재영은 민석의 얼굴을 계속 힐끔힐끔 엿본다. 쟤 연기할 때 꼭 저런 표정 짓던데.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돌연 승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동 안무를 멈춘다.

 

“잠깐만! 그게 아니라니까. 민석이 여기 또 틀렸네. 여기서 쿵, 할 때 더 내려가야 된다고.”

“아, 죄송해요…….”

“괜찮아? 좀 쉬었다 할래?”

“아뇨! 괜찮아요. 방금 거기부터 다시 해 볼게요.”

 

늘 그랬듯 싱긋 웃어 보이곤 승준이 말한 대로 자세를 고쳐 잡아 안무를 마저 이어가는데, 웃음기가 얼마 채 되지도 않아 금세 사라져 버린 그 잠깐을 결국 재영이 목격해내고 만다. 너 무슨 일 있는 거구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진 찰나, 다른 여섯 명과 박자가 엇갈린 한 사람의 신발 밑창이 바닥에 미끄러져 끽 하고 튀는 마찰음을 낸다. 이번엔 모든 시선이 재영에게로 쏠린다. 그는 일부러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연기를 한다.

 

“아, 미안. 진짜 미안! 순간 이쪽인 줄 알았어.”

“안 되겠다, 야. 쉬었다가 해야겠다. 이따 2절부터 다시 시작!”

 

휴식 시간을 알리는 승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아 차오르는 숨을 고른다. 민석이 지친 얼굴로 쪼그려 앉아 가만히 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는다. 그러던 그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하자,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재영이 티가 나지 않게끔 전화 받으러 자리를 피하는 척 뒤따라 나선다. 그는 정수기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 민석의 가녀린 뒷모습을 좇으며 몇 번이고 잡을까 말까 망설인다. 잡을까, 말까, 잡을까……. 잡자. 물 한 모금 마신 민석의 어깨를 손을 뻗어 살짝 잡으니, 고개가 돌아가면서 그 맑고 땡그란 두 눈망울이 무슨 일이냐는 듯 재영을 바라본다.

 

“잠깐 밖에 나갈까?”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민석의 귀를 간지럽힌다. 그는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기에 대답을 대신하여 조용히 끄덕이기만 한다. 재영은 민석의 한쪽 어깨 위에 올렸던 손을 반대편으로 옮겨 아예 어깨 전체를 한 팔로 확 감싼다. 자연스러운 어깨동무를 하고서 연습실 안에 있는 각자의 패딩을 챙기러 길을 되돌아 가는데, 마침 연습실 문을 열고 잠깐 나온 효진이 짐짓 진지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들의 앞에 우뚝 서서 가로막는다.

 

“뭐야, 어디 가. 둘이 먹을 거 사러 가? 나도 같이 가.”

“이 형이 먹을 거는 무슨. 데이트 간다, 데이트!”

 

눈치 없이 끼어들려는 효진에게 한껏 능청을 떤 재영이 방금 전의 말을 속으로 곰곰이 되새겨 본다. 데이트? 당황해서 튀어나온 아무 말이었지만 퍽 귀엽고 가슴 설레는 단어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괜스레 귀 끝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에 너무 늦진 말라는 효진의 말을 뒤로하곤 민석을 이끌어 외투 챙겨 입기를 서두른다.

제법 차가운 새벽 두 시의 공기가 바깥으로 나온 두 사람을 맞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입김은 주황빛 가로등 불 밑을 지날 때 더욱 선명하다. 모두가 잠든 고요함 속에 오직 두 사람의 터벅터벅 느린 발걸음 소리만 가득하다. 재영이 이 어색한 정적을 깨기 위해 일부러 밝은 말투로 말을 건다. 와. 이거 입김 봐, 민석아. 이제 롱패딩 입어도 춥다잉.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옆에서 천천히 걷던 민석이 그 말에 푸스스 웃다가 그를 올려다보곤 묻는다.

 

“근데 갑자기 왜 나오자고 한 거예요?”

“엉? 그,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은데 혼자 나오면 재미없잖아~”

 

아, 하고 민석이 짧게 수긍하는 소리를 내곤 다시 고개를 푹 숙여 걷는다. 사실은 네가 걱정돼서 그랬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삼키고 정처 없이 걷는데 저 앞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놀이터 하나가 둘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 안에 배치된 가로등의 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야심한 시간에 사람은커녕 동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좀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재영은 민석을 바라보며 묻는다. 들어가 볼래? 그럴까요? 둘은 놀이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치의 동선 차이도 없이 그네가 바로 앞에 보이는 정자로 걸어가 나란히 착석한다. 마음이 통한 재영과 민석이 동시에 마주본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서로의 시선이 서로의 눈동자에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파도처럼 화악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이내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또 동시에 고개를 앞쪽으로 돌린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한 쌍의 그네가 찬바람 때문인지 오늘따라 공허해 보인다. 재영이 운을 떼기 전에 검지로 콧잔등을 한 번 쓸고는 제 신발 끝을 쳐다본다.

 

“민석아. 요즘 힘든 일 있니?”

“네? 아뇨, 딱히 없는데…….”

“거짓말. 한창 다음 활동 준비할 시기에 힘든 일이 없긴 왜 없어?”

“아이, 형. 그렇게 치면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요. 저 괜찮아요, 진짜로.”

 

말 끝에 더해진 맥없는 웃음소리가 누가 봐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라는 걸 증명해 준다. 너 방금 그거 억지 웃음이지. 재영이 장난기 어린 말투로 얼굴을 들이밀며 표정을 확인하려 드는데,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싶은 건지 민석은 고개를 푹 숙여 그의 눈을 피한다. 안 그래도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아쉬움 뚝뚝 묻어나는 말을 흘린 재영이 앞에 보이는 그네 쪽으로 시선을 둔 채 무심히 툭 던지듯 얘기를 잇는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힘들면 쉬었다 하고 그래. 너 그러다 쓰러진다.”

“…….”

“고민 있으면 혼자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어? 형들이 있는데 어리광도 좀 피워~”

 

귀여우니까. 가장 핵심이었고 본심이었지만 분위기 상 절대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재영은 머리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미쳤구나, 심재영. 지금 진지한 얘기하다 말고 뭔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제 팔불출 본능에 스스로를 꾸짖던 그때, 잠깐 동안의 정적을 깨고 민석이 입을 연다. 사실 안 피우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 말에 재영의 고개가 홱 민석 쪽으로 돌아간다.

 

“막내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안 힘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민석아, 어쨌든 우린 팀이잖아. 누구 한 명이라도 속이 곪아 있으면 전체가 아픈 거랑 마찬가지야.”

“에이, 이러다 말겠죠 뭐. 너무 걱정하지 마요.”

“별 일 아니라고 혼자 쌓아 두기만 하면 큰 문제가 된다니까? 그때 그때 참지 말고 풀어줘야, 나중에 돌아봤을 때 진짜 별 일 아닌 게 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형, 자꾸 이러지 마세요.”

“어?”

“…… 기대고 싶어진단 말이에요.”

 

민석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텅 빈 그네를 바라보고 어떠한 심경 변화라도 생겼는지 그는 꽤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제가 형들하고 유토한테 짐이 되는 게 싫었어요. 솔직히, 지금 다 똑 같은 마음이잖아요. 이번엔 정말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도, 과연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함도. 뻔히 다 알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그래요.”

“…….”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형. 저는…….”

 

가만히 듣고 있던 재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민석의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그러쥔다. 민석이 고개를 들자 까만 어둠 속에서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 서로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각자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두근거림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재영은 민석의 눈에서 간절한 SOS를 읽을 수 있었다. 도와줘요. 저 좀 도와주세요, 형.

 

“힘들다고 말해.”

“…….”

“지금 여기선 참지 않아도 돼. 우리 둘만 있잖아. 그치? 힘들다고 말하고, 울고 싶으면 울어.”

“재영이 형.”

“응, 민석아.”

“…… 힘들어요. 저, 힘든 것 같아요.”

 

투둑. 투둑. 물방울이 어딘가에 떨어져 흩어지는 소리를 낸다. 민석이 운다. 눈물이 한두 방울 뚝뚝 검은 패딩 위로 떨어지더니 곧 손으로 훔쳐내야 할 정도로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그토록 바라던 말이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재영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속 깊은 건 알고 있었는데 이제 정말 다 컸구나. 기특함 반 안쓰러움 반에 민석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느끼며 그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곧 움직이던 손을 목까지 올려 뒀던 제 패딩 지퍼로 가져가 그것을 반쯤 쭉 내린다. 그러더니 아예 민석의 조그만 머리통을 꼬옥 끌어안아 제 따뜻한 품 안에 가둔다. 상의가 눈물로 젖어 들어가면서 한없이 색이 짙어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재영은, 민석의 머리 위에 턱을 살포시 올리곤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랜다.

 

“나도 그 마음 알아. 아주 잘 알지. 근데 그거, 나중에 가서 돌이켜 보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지금의 너, 그리고 네 주변 사람들을 믿고 같이 견뎌내면 돼. 그렇게 성장하는 거야.”

“혀엉…….”

“방금 저거 보고 생각난 건데 그네 탈 때랑 비슷해. 그네 타기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거고, 그 사람이 날 더 높은 곳으로 안전하게 올려 줄 거란 믿음이 있어야만 탈 수 있는 거잖아.”

“…….”

“우리 민석이 잘하고 있는데 왜~ 누가 그랬어. 엉?”

“고마워요, 재영이 형. 킁, 형 덕분에 좀 홀가분해졌어요.”

“다음부턴 절대 혼자 끙끙 앓지 마. 알겠지? 내가 있으니까.”

 

나긋나긋하게 타이르는 재영이 껴안았던 민석의 머리를 품에서 살짝 풀어내고 그를 내려다본다. 제 정수리에 머무르던 작은 온기가 떨어지자 눈물을 그친 민석이 고개를 들고, 둘의 눈길이 처음 이 정자에 앉았던 순간처럼 다시금 오랫동안 서로의 눈동자에 머무른다. 눈물로 촉촉해져 물기가 어린 민석의 눈가가 재영의 심장을 방망이질 하게 만든다. 둘만 존재하는 공간, 지긋이 마주보는 시선, 아찔하도록 가까운 얼굴, 조금은 무르익은 분위기……. 왠지 이대로 입을 맞춰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재영이 심각한 내적 갈등으로 시달리던 그때, 민석이 다시 한 번 킁 하는 소리를 내며 어느새 빨개진 코를 훌쩍인다. 그래, 울고 있던 애한테 지금 뭘 하려는 거냐. 한숨을 삼킨 재영이 민석의 패딩에 달린 모자를 잡고 그의 머리에 쏙 씌워 준다.

 

“춥지? 가자, 민석아. 갈 데가 있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는 민석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나 근처의 한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보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민석이 여전히 재영의 손을 잡은 채 묻는다. 형, 여긴 왜요? 신발을 질질 끌면서 재영의 뒤에 바싹 붙어 졸졸 따라다니는데 앞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온 얼굴에 잠시 행복한 미소를 머금던 민석이 곧 한껏 시무룩한 소리를 낸다. 저 지금 다이어트 중이란 말이에요……. 그 귀여운 칭얼거림에 광대가 하늘 끝까지 솟은 재영이 유제품류가 모여 있는 코너 앞에 멈춰 바나나 우유 하나를 집어 들곤 뒤돌아선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맞지?”

“네! 좋아해요.”

 

아까 그렇게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리던 사람은 어디 가고, 재영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서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곤 새벽의 어둠도 환히 다 밝힐 기세의 눈웃음을 치는 사람만 있다. 목적어가 생략된 ‘좋아해요’라는 말의 위력은 꽤나 강력했다. 괜히 부끄러워진 재영은 저도 모르게 근처에 배치된 바구니를 빠르게 찾아 들고 와 그 안에 바나나 우유 열 개를 담는다. 형, 저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 없어요! 바나나 우유로 빽빽해진 바구니를 보고 당황한 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쳐 보지만 소용없다. 재영은 곧장 계산대로 가 쿨하게 결제를 하고 우유로 가득한 까만 비닐 봉투를 민석에게 건넨다. 자, 이거 다 네 거야. 그것을 한아름에 받아 안은 민석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먼저 편의점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붉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재영과 민석에게 연습실로 돌아가는 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서로의 관계에 있어 오묘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일까, 어쩐지 밖으로 막 나왔을 때와는 달리 포근하고 훈훈한 기류가 둘의 주변을 맴돈다. 평소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만 보던 좋아하는 아이의 아픔을 유일하게 공유 받았다는 사실에 재영은 내내 흐뭇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석은 옆에서 말없이 발 맞춰 걷기만 할 뿐이다. 자신과 같은 마음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재영이 고개를 돌린다. 두둑한 비닐 봉투를 소중히 가슴 가득 안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며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는 민석의 모습에, 재영의 마음 속 거친 소용돌이가 일어나 휘몰아친다. 그 충격에 재영이 한 손으로 꽤 무거운 비닐 봉투를 그 품에서 거뜬히 빼앗아 든다. 이번에도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행동이었다.

 

“야, 너…… 너 그렇게 귀엽게 하고 막, 빤히 쳐다보지 마라. 형 심장 아프다.”

“진짜요? 그 정도예요? 어어, 나 별 거 안 한 것 같은데.”

“맞아. 민석이 넌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귀여워. 되게 잘 알고 있구나?”

 

심장이 왼쪽 가슴 가까이에 있었나? 심장의 위치도 헷갈릴 정도로 혼란해진 재영이 손으로 제 가슴팍을 슥슥 문지르며 종종걸음을 친다. 빠르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 보려 의도치 않게 저만치 멀어지는데, 그 뒤에서 우물쭈물하며 점점 걷는 속도를 줄이던 민석이 뭔가 결심한 듯 우뚝 멈춰 큰 소리로 외친다. 재영이 형! 앞서가는 줄도 모르고 직진하던 그가 별안간 불린 제 이름에 그 자리에 서서 홱 뒤를 돌아본다. 쓰고 있던 패딩 모자를 뒤로 벗어 젖힌 민석이 묘한 표정으로 재영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 형, 잠깐 귀 좀 빌려주세요. 불과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오만 가지 생각들이 재영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갑자기? 얘기 엿들을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귀를 빌려 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아담한 민석의 키에 맞춰 밑으로 살짝 낮춰져 있었다. 민석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내 재영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너무나도 밀착된 거리 탓에 뜸 들이는 순간의 긴장된 작은 숨소리마저 느껴진다.

 

“고마워요.”

 

쪽. 짜릿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재영의 볼에 민석의 따뜻한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볼 뽀뽀에 자칫 잘못하면 정말 눈알이 튀어나오겠다 싶을 정도로 재영의 눈이 잔뜩 커다래진다. 마치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혀 별을 보는 기분 같았다. 지금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보처럼 그저 멍하니 민석을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재영은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콧김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까지 버벅거리며 겨우 묻는다.

 

“민석아. 방금, 방금 그거 뭐야?”

“아, 어떡해…….”

 

오히려 먼저 선수를 친 민석이 빨개진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친다. 그러다 수줍은 미소를 온 얼굴에 만연히 띠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 버린 그의 귀여운 뒤통수를 멍하니 지켜보던 재영. 아직도 그 촉촉한 온기가 남은 것 같아 민석의 입술이 머물렀던 볼을 손으로 매만진다. 얼굴이 화끈화끈 뜨겁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열이 나는 것 같다. 망부석마냥 가만히 서서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암만 생각해 봐도 볼 뽀뽀라는 이 깜찍하고 발칙한 행동에 아무 의미 없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 그 발그레 홍조 띤 얼굴이란! ‘그냥 친한 형’ 앞에서 지을 만한 그런 건 절대, 결단코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영의 입꼬리가 참을 수 없이 올라간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달려가 민석을 따라잡은 다음, 도망가지 못하게 그를 품에 가두고 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붓고 싶었다. 상상만 해도 손이 근질근질해진 재영은 입맛을 다시며 그가 더 멀어지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불타던 재영의 마음에 제대로 기름이 콸콸 쏟아 부어진 이 밤, 남몰래 관계 진전을 이룬 두 사람의 앞길을 더욱 찬란히 비추기라도 하려는 듯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휘영청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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