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학교 일진짱?
W. 세이
'마지막 이사'를 했다. '마지막 이사'란 아버지의 표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즈음 부터 일이 년 단위로 이사를 다녔다. 아버지의 전근이 그 이유였다. 어쩌다 상부의 눈에 나게 된 아버지는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뺑뺑이 돌듯 발령을 받았고, 아버지는 묵묵히 그 발령을 받아들이셨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전근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는 급박한 기간에 당황하며 이사 준비를 하였다. 이사를 마치고 그 지역에 익숙해질 때 즈음 또다시 전근 소식이 날라왔고, 그때도 우리 가족은 정신없이 이사했었다. 그렇게 이사 횟수가 쌓이고 이젠 이사가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아졌을 때 즈음, 아버지는 승진 소식과 함께 '마지막 이사'란 말을 꺼내셨다. 아버지 전근으로 인한 이사는 이것이 마지막이란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사 온 곳은 이사 다니기 시작하기 전 살던 곳이었다. 기억이 날 때 부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곳. 유치원 졸업식을 하고 이사를 갔다가 고2를 올라오며 다시 이사를 온 것이니 꼬박 10년 만이었다. 십 년간 달라진 건 내 눈높이뿐, 동네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부모님은 크고 작은 가게들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지만, 내 기억 속 동네는 어렴풋한 실루엣이 다여서 내겐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2월 마지막 날, 이사를 끝내고 하루 동안 쉰 뒤 새로운 학교로 등교했다. 교복은 이삿날에 짐을 다 옮긴 후 받아 왔고, 새로운 학교라지만 알던 동네의 알던 학교라 큰 어려움 없이 등교하였다. 교무실을 찾아가 선생님을 뵙는 것까지 어렵지 않게 했다. 잦은 전학으로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교탁 앞에 선 담임 선생님의 앞에 서니 긴장이 되었다. 새로운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아무리 해봐도 어색하고 떨리는 일이었다.
"이름은 이창윤. 전주에서 아버지 전근으로 전학 왔다. 어차피 새 학기 첫날이니까 같은 반 해본 적 없는 친구랑 같은 반 됐다 생각하고 잘 지내라잉."
담임은 속사포로 나를 소개하더니 툭 쳐서 인사를 시켰다. 나는 반갑다고 한마디 하였다. 뻘쭘한 느낌이 들어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창가쪽 분단 맨 뒤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담임은 2학년이 되었으니 공부 좀 하고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한참 쏟아내더니, 지금 앉은 자리로 고정하란 말을 남기고 출석도 안 부르고 반을 나가셨다.
이때 부터였다, 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아무리 새학기 첫날이라 하더라도 오며 가며 만난 것 같은 얼굴인 애들에겐 굳이 안 다가가더라도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인 전학생에겐 인사라도 건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반을 찬찬히 둘러보았더니, 반 안에는 새 학년 새 학기 첫날의 어수선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무겁고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눈치를 보던 나는 엎드려 자고 있는 짝꿍을 슬쩍 건드렸다. 검지로 팔뚝을 쿡쿡 찔렀다. 짜증 낼 게 분명했지만, 남자애들끼리 그러고 투닥투닥 거리면서 친해지는 것이란 생각이었다. 짝꿍은 꿈쩍도 안 하고 계속 자기만 하였다.
"안 돼!"
다시 한 번 짝꿍을 깨우려고 검지를 다시 들려는데 누군가가 지른 소리였다.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소리를 지른 애로 추정되는 애와 몇몇 애들이 겁을 먹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뭔 소리냐는 질문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아, 씨발. 어떤 새끼야."
살짝 잠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욕과 짜증이 담긴 말 때문에 겁이 조금 나긴 했지만, 얼굴이 궁금하여 고개를 돌렸다. 어? 어딘가 익숙한 얼굴인데. 그건 짝꿍도 마찬가지였던 것인지 계속해서 짜증을 내다가 내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알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 속을 뒤지는 도중 짝꿍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 잠이 덜 깼나. 창돌 같아 보이는데."
창돌. 그 한 마디에 이름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날 창돌이라 부르기 시작한 녀석. 덕분에 내 별명은 이사가기 전까지 내내 창돌이었다.
"아, 김효진?"
"시발, 진짜 이창윤임?"
"짜식, 오랜만이다."
어릴 적 매일같이 놀았던 녀석, 김효진이었다.
* * *
"아, 씨발. 내 소시지."
내 식판 위로 젓가락 하나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니 소시지가 하나 없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뭐? 씨발?"
이승준이었다. 이승준은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야. 내 소시지잖아."
진짜로 화난 게 아니란 게 아는데 겁이 난 나는 자세를 낮추고 변명을 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주먹 하난 센 놈이니까.
"이창윤 개웃겨. 기는 것 봐. 야, 넌 내가 그렇게도 겁나냐."
이승준은 얄밉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꼴을 보아하니 가져간 소시지를 돌려줄 것 같진 않을 것 같아, 김효진의 식판에서 나도 소시지를 가져왔다. 소심한 복수로 이승준의 말은 얌얌 씹고.
"아 아! 이창돌! 내껄 왜 뺐냐구. 이승준 거 갖고 가라고!"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에 대해선 예민한 김효진이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김효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 식판을 김효진과 반대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나 안 그래도 오늘 학주가 까서 졸라 짱난다고."
"우쭈쭈 우리 효지니 그래써여?"
"씨발아, 내 소시지 내놓으라고."
"가져가던가."
나는 김효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김효진은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예상대로 김효진은 조금 더 씩씩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김효진을 돌아보니, 김효진은 잔뜩 삐진 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자리를 벗어났다. 심했나, 밥도 다 안 먹었는데 가고. 짜증 나면 짜증 날 수록 밥으로 푸는 거 뻔히 아는데, 원래도 밥은 안 남기는 애가 밥을 먹다 급식실을 나가니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있다가 매점 들려서 빵이라도 사가야겠다. 속으로 그런 결심을 하고 밥을 다시 먹으려는데 이승준이 말을 걸었다.
"야, 이창윤. 너 진짜 나 왜 겁내냐."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효진이 아니었으면 너랑 친하게 못 지냈어."
쓸데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묻길래 최선을 다해 대답해줬다. 나는 먹던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이승준은 오히려 아예 젓가락까지 내려놓으며 다시 또 말을 걸었다.
"그게 궁금하다고. 야, 따지고보면 김효진을 더 무서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김효진이? 야, 김효진이 뭐가 무섭다고."
"내가 효진이한테 지는데?"
"그건…."
"진짜 넌 대단해. 어떻게 밥 먹는 김효진을 건드냐. 방금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이승준 말이 맞는 말이긴 한데, 진짜 김효진은 겁이 안 나는 걸 어떡해. 김효진이? 왜? 김효진 진짜 주먹으로 짱 먹는 애 맞긴 하고? 한 번도 나한테 힘쓰는 김효진을 본 적이 없는 나에겐, 김효진은 어릴 적 내 손잡고 다니던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 * *
반으로 돌아오니 김효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상할 건 없는 일이었다. 전학 온지 약 한 달. 내가 직접 본 건 손에 꼽았지만, 김효진이 등하교를 제때 하는 건 특별한 일이라고 하였으니까. 오히려 요즘 열심히 등하교하는 걸 두고 모두 다 신기하다고 하였다. 오죽했으면 학주가 수업 들어와서 김효진을 칭찬해. 정신 차린 거냐고. 김효진은 물론 그때 학주의 말을 생까고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청했다. 학주가 그래서 그럼 그렇지라며 잠깐 소리를 질렀지만. 김효진한테 주려고 산 빵과 우유를 김효진의 자리에 툭 내려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김효진이 없을 땐 종종 김효진과 같이 야자를 째기도 했지만, 김효진이 없는 나는 쫄보에 불과했다. 이승준은 혼자서 째긴 심심하다며 나를 꼬셨지만,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이승준이 모범생인 척한다고 놀렸지만, 사실이어서 가만히 입 닥치고 있었다. 뭐, 왜, 뭐. 그럴 수도 있지.
"아, 창윤아, 같이 째자. 응?"
"네가 언제부터 나랑 하교했다고 이 지랄인데. 그냥 혼자 가세요."
"안 돼, 그럼 나 혼나."
"혼나? 누구한테?"
"있어, 그런 게."
이승준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순간 이승준한테 또 쫄았지만, 아닌 체를 하였다. 한 번도 나랑 같이 하교한 적 없으면서 왜 이런데. 안 하던 짓을 하는 이승준이 궁금하였지만, 겁이 나 물어보진 못했다. 몇 번 더 나를 꼬시던 이승준은 그냥 내 옆자리, 김효진 자리에 앉았다.
"그럼 나 여기서 잘래."
"너네 반도 아니면서 왜 여기서 굳이?"
"어허, 형님이 하는 말에 말이 많다."
"형님은 무슨."
"됐고, 너 갈 때 나 깨워줘. 같이 가야 해. 알았지?"
이승준은 엎드리며 말을 하였다. 쓸데없이 겁이 나서 이승준이 못 볼 걸 알면서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알았다고 답했다.
* * *
이승준은 교문을 나서서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 싫은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승준이 겁난다. 하지만 생리현상까지 속으로 해결하기엔 무리였다. 조금 지나 담배 연기가 내게 다가오자 기침이 나왔다. 참는다고 참아봤지만 무리였다.
"뭐야, 담배 연기 못 맡음?"
"응."
내 대답을 들은 이승준은 씨익 웃더니 내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뱉었다.
"씨발, 아."
콜록콜록. 욕이 절로 나왔다. 이승준은 크게 소리 내어서 웃으면서 땅에 담배를 버렸다.
"그냥 버리는 것임?"
"왜? 펴줄까?"
발로 담배를 짓이기며 이승준이 물었다. 표정엔 장난끼가 가득했다.
"그냥 물어보는 거지, 그냥."
"효진이가 네 앞에서 담배 피우냐?"
"담배? 피우긴 하는데 거의 헤어질 때 즈음? 안 피우는 날도 많고."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어려울 게 없는 질문이라 답을 해줬다. 이승준은 이게 뭐라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얘기를 들었다.
"와, 졸라 사랑이네."
"뭐가?"
"김효진. 난 멋으로 피우지만, 걘 진짠데."
무슨 소리지. 이승준의 말이 제대로 이해 가질 않아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이승준은 멋으로 피우는데 김효진은 진짜라고? 뭐가? 담배 피우는 게? 담배 피우는 게 진짜란 게 뭔 소리지. 원래라면 이런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이승준이 조잘조잘 말을 걸었을 것인데, 타이밍 좋게 이승준에게 온 전화 덕분에 이승준은 내게 신경을 끊었다.
나는 나대로 생각에 집중을 하고, 이승준은 이승준대로 전화에 집중을 하며 걸어갔다. 애초에 이승준하고는 단둘이는 커녕 김효진을 껴서도 같이 하교한 적이 없어 어색할 것 같아 걱정하였는데, 이런 분위기 나쁘지 않았다. 진짜 얜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나랑 같이 집에 가겠다고 한 거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안 나올 물음을 떠올렸다. 이승준, 이상한 자식.
어느 정도 학교에서 떨어지자 하교하는 다른 애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원래라면 뭔 일이 생길지 몰라 큰길로 돌아갔지만, 이승준이 있기 때문에 겁 없이 골목으로 들어선 탓이었다. 근데 이승준은 여기로 가도 되나? 얘 어디 살지. 집이 가까워지자 그제야 이승준 생각이 났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애도 아니고. 이쪽으로 가야 하니까 왔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어이, 거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옆 학교 교복을 입은 세 놈이 있었다. 무시를 하려고 하는데, 그중 한 놈이 정확히 나를 쳐다보며 말을 반복했다. 거기 너. 나는 나도 모르게 답을 했다.
"나?"
"그래 씨발. 너. 네가 김효진보다 쎄다는 새끼냐?"
"뭐?"
"그니까 네가,"
"이게 누구냐. 씨발. 졸라 나한테도 한주먹도 안 되는 좆밥 새끼가 왜 나대냐."
그놈의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어느새 전화를 끊은 이승준이 말을 껴들었다. 조금 방금 전까지 웃는 얼굴로 찡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전화 중이었는데, 이승준은 어느새 싸늘한 표정으로 옆 학교 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승준, 네가 왜 여기에?"
"네가 알 바야? 씨발, 너야말로 왜 여기서 지랄이신데요. 그것도 존나 셋이서."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까 가던 길 가라."
"그래, 이창윤 보러 온 거잖아.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내가 너 친히 보러 온 거잖아. 이창윤까지 갈 일 있냐? 내 선에서 끝내면 되는데."
이승준의 말에 옆 학교 놈들은 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았다. 이승준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교묘하게 나를 자신의 등 뒤에 뒀다.
"할 거면 빨리하자. 형님 바쁘시다. 세 놈이니까, 원, 투, 쓰리, 주먹질 세 번이면 될 것 같은데."
"비겁하게 네가 나서냐?"
"씨발, 졸라 머리 빈 거 인증하지 마라. 비겁하단 말은 이창윤 하나 치러 셋이서 온 너흴 보고 쓰는 말이야."
"아니,"
"덤비라니까?"
"씨발, 이번엔 그냥 간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보자, 이창윤."
"나부터 이기라고요 새끼들아."
옆 학교 놈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부리나케 뛰어 도망쳤다. 이승준은 그놈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대만."
이승준은 짧게 한 마디를 남기고는 나에게서 몇 발자국 옆으로 떨어졌다. 이승준이 걸음을 옮겼고, 나도 이승준을 따라 같이 걸음을 옮겼다.
"김효진이 말하지 말랬는데, 쟤네 때문이었어. 효진이가 나한테 문자로 부탁했어. 말하면 겁먹을 거 뻔하니까 말하지 말라고."
"아…어?"
"쟤네가 아무리 좆밥이라 해도 싸우고 다니는 새끼들이야. 창윤아, 나나 효진이 없을 땐 조심해서 다녀."
무어라 답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승준은 딱히 답을 바랐던 건 아니었는지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우며 걷기만 했다. 김효진은 그렇게까지 날 생각했단 말이야? 담배 연기가 내 쪽으로 날라왔지만, 기를 쓰고 피하는 대신 슬쩍 들이마셨다. 공기 중 흩어져 옅어진 담배 연기는 마실 만 하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건가. 알싸한 담배 연기가 어딘가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듯하였다.
* * *
김효진은 물론이고 나는 그 날 일은 모른 체 하였고, 이승준도 우리에게 맞춰서 같이 입을 다물어줬다. 하지만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오만 게 신경이 쓰였다. 김효진은 정말로, 내가 의식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주고 있었다. 사소하게는 내가 하는 유치한 장난을 다 받아줬으며, 나한테는 짜증은 내도 화는 안 내었고, 내가 하는 부탁은 투덜거리긴 해도 다 들어줬다. 그리고 이래저래 김효진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하다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잘생겼다.
김효진은 확실히 잘생겼다. 얼굴도 쪼그맣고. 김효진은 그냥 김효진이었는데, 잘생겼단 사실을 깨닫고 나니 괜히 김효진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보면 떨려서 헛소리할 것 같아서. 김효진을 보는 대신 김효진을 괴롭혔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다른 애들은 물론이고 이승준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게 김효진이었는데, 내 한 마디에 이리 저리 움직이는 김효진을 보며 이승준은 공주와 하인이라 놀렸다. 김효진이 화 한 번 안 내고 다 들어주는 모습을 보는 걸 즐기고 있는 듯 하였다.
머리가 아프단 핑계로 체육 시간에 교실에 남았다. 김효진한테 같이 있어달라 했고, 김효진은 지 좋아하는 체육도 마다하고 교실에 남았다. 오늘 삼 반이랑 축구 한댔는데. 김효진은 그건 상관없는 것인지, 휴대폰을 꺼내 열심히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나는 김효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좋다, 김효진.
"야, 김효진."
"왜."
"물 좀 떠다 줘."
"아오,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이것만 하고 해줄게."
"그리고 나 좀 있다 과자 좀 사줘."
"존나 진짜 공주님이냐? 물 달라, 과자 달라."
"안 사줄 거야?"
"네, 네. 공주님. 사드릴게요."
"오늘 야자도 하고 가는 거지? 같이 가자."
"씹, 알았다, 알았어."
"그리고 또"
"또 뭐?"
"사귀자."
김효진을 놀린다는 걸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다 본심을 말했다. 내가 말을 꺼내놓고 내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내 말을 취소하려는데, 김효진이 조금 더 빨랐다.
"그래."
"아, 미친. 아니야, 이건 취소."
"진짜?"
김효진은 내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긴장이 되어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김효진이 갑자기 무서워졌다거나 한 게 아니었다. 코앞에서 김효진과 눈을 마주치고 있기 버거워서였다. 김효진은 한 번 더 물어봤다. 진짜? 우물쭈물 아무말도 못하던 나는 조심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김효진의 표정이 묘하게 안 좋게 변하였다. 나는 얼른 말을 덧붙혔다.
"사귀자 말고, 고백해줘."
"그래."
김효진은 얼굴을 물리고 허리를 펴고 앉아 나를 바라봤다. 내가 고백할 것도 아닌데 입이 바싹 말랐다.
"이창윤. 사귈래?"
"내가 왜?"
"내가 널 좋아하고, 네가 날 좋아하니까?"
훅 들어 온 김효진의 팩트 폭력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혀로 건조한 입술을 축이고만 있으니 김효진이 한마디 더 했다.
"사귀자."
나는 김효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응."
귀 끝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상관없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김효진의 심장 소리가 매우 빨랐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