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카오와 버블티
대망의 날이었다. 6개월 동안 짝사랑했던 누나에게 고백할 예정이었던 민석은 PC방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공책에 끄적거린 프러포즈 대본을 한 줄 한 줄 읊었다. 던전에서 보낸 시간, 파퀘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서 서로를 많이 알아봤잖아요. 그래서 우리 결혼도 했고. 나는 누나랑 내가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난 누나가 좋은데, 누나는 어때요? 누나만 괜찮으면…우리 진짜로 사귀지 않을래요? 열 번을 읽어도 이 시대에 더는 없을 고백이라 생각한 민석은 모니터 옆 잘 보이는 곳에 공책을 세워두고 손을 풀었다.
[커플알림] '핑키공쥬12' 님이 접속을(를) 하였습니다.
때가 도래했다. 민석은 커플 창에 뜬 핑키의 위치를 보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핑키는 길드에서 만난, 민석보다 5살이나 많은 누나였다. 혼자 사냥을 하던 민석에게 다짜고짜 '님 길갑ㄱ?' 하며 길드신청을 강요하는 핑키의 기에 말린 민석은 얼결에 가입신청을 하게 되었다. 근데 저를 왜요? 님 아이디에 '12' 들어가잖아요. 이유는 간단했다. '밀크왕자'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용 중인 닉네임이라 떴고, '1'을 하나 더 붙여도 사용 중 닉네임이라더라. 한숨을 쉬며 '2'까지 붙여 '밀크왕자12'가 되었던 민석은 얼결에 신생길드 '12투웰브12'의 멤버가 될 수 있던 것이었다.
핑키와는 동접 시간이 비슷했던 민석은 같이 사냥을 하고 퀘스트를 깨다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감정이 싹텄던 것 같다. 무엇보다 민석의 눈엔 핑키의 핑크색 양갈래 머리가 너무 귀여웠다. 게다가 애교도 정말 많았거든. 그렇지만 감히 민석이 넘볼 수 없던 것이, 그때만 해도 핑키는 당시 쪼렙이었던 민석을 쩔해주던 길드마스터의 첩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건다시마 마냥 버석하게 말라가는 심장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민석은 어느 날 갑자기 길마가 돼있는 핑키를 보고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숨기며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 하는 핑키는 민석의 마음속에 대단한 우상처럼 자리 잡았다.
게다가 전 길마는 길드에서도 쫓겨났고 핑키와 관계도 정리가 된 것 같았다. 예쓰. 민석에게는 최고의 찬스였다. 방학동안 눈에 불을 켜고 게임을 플레잉한 덕에 레벨도 핑키보다 2렙이나 자기가 더 높겠다, 생일 선물로 받은 문화상품권으로 풀장비도 갖췄겠다, 민석은 자신이 핑키의 배우자의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겜에서 레어템 하나를 혼수로 바치며 청혼을 했고, 핑키는 기뻐하며 승낙했다.
-밀크왕자12 : 핑키누나 나 할 말 있는데...
핑키와 만나자마자 1:1 대화창을 킨 민석이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핑키는 '응응?? 모야모야??' 거리며 평소처럼 애교 듬뿍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전에 나눈 대화에서부터 핑키와 가까운 동네에 산다는 것을 민석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사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다. 벌써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고백만 안 했지 사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핑키누나가 자신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석은 공책에 미리 써둔 사랑고백을 거침없이 베껴 써내려갔다. 박력 있게 엔터까지 딱 친 순간,
-핑키공쥬12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민석은 대화창이 키읔으로 가득 물 드는 광경을 봤다. 뭐야, 이 누나. 장난하는 건줄 아나봐. 누나, 저 진지해요. 시무룩한 얼굴로 타자를 친 민석이 이어질 핑키의 답을 기다렸다. 핑키는 '내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 그렇게 막 고백하냐.' 고 했다. 약간 말투에서 딱딱함이 느껴졌다. 맨날 붙이는 하트도 없고. 저는 누나가 어떻든 상관 안 해요, 내면을 좋아하는 거라구요. 민석이 투명한 안경 알 너머로 똘망똘망한 눈을 빛냈다. 한참이나 답이 없던 핑키는 대뜸 '너 백석초 다닌다고 했지? 8시에 그쪽으로 와봐.' 라고 말했다. 민석은 시계를 한 번 쳐다봤다. 6시 반이었다. 학교까지 가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알겠어요. 답을 한 민석은 대화창을 끄고 게임을 했다.
근데 영 집중이 안 됐다. 평소라면 5분 만에 끝냈을 파퀘도 7분이 넘게 걸렸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그냥 가서 기다려야겠다. 민석은 PC를 종료하고 학원 문제집으로 무거운 가방을 짊어졌다. 저녁 시간에 혼자 학교에 가는 건 거의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집-학교-학원-PC방-집 이 루트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글짐에 올랐다가 뛰어 내렸다가, 철봉에 통구이마냥 매달렸다가 한 바퀴 돌았다가. 한참 시간을 때우고 건물에 달린 시계를 보니, 7시가 거의 다된 시간이었다. 민석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벤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운동장에는 조깅을 하는 동네 주민과 목으로 트월킹하는 회갈색 비둘기만 있었다. 아직 안 왔나. 민석은 거의 발끝만 닿는 운동장 바닥을 신발 코로 긁었다. 혼신을 담아 핑키누나, 라고 흙으로 판화를 하던 민석은 갑작스럽게 제게 들이닥친 그림자 하나에 황급히 바닥을 쓸어 글자를 지웠다.
"야."
남색 마이에 회색 바지. 옆 동네 중학교 교복이었다. 뭐지, 시비 거는 건가. 민석은 치켜세우던 시선을 재빨리 자신의 무릎으로 고정 시켰다. 네. 대답도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똘똘한 민석은 자칫 폭력적인 사건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있었다. 조깅하는 아주머니의 걷는 속도 값을 계산해 이쪽으로 다가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갈 것까지 생각했다.
"너 밀크지?"
"……네?"
하지만 예상에서 훨씬 벗어난 값에 민석이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야, 핑키."
민석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내 첫사랑 누나. 핑키. 핑키가 누나가 아니었다. 핑키가 남자였다. 핑키가 옆 동네 남자 중학교에 다니는 남자 중학생이었다. 내 첫사랑이 말이다. 교복 명찰에는 '이창윤'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차라리 이름이 '이핑키'라도 됐으면 화가 덜 났을 텐데. 민석은 아무 말 없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제와 말하는 거지만, 울기도 엄청 울었다. 첫사랑의 쓰라림을 너무 일찍 느껴버린 민석은 그렇게 목을 매던 게임을 하루아침에 접었다. 이창윤 개새끼. 안 하던 욕까지 삐처리도 없이 중얼거렸다.
여기까지가 이창윤과 김민석의 첫 만남이자 일방적인 악연의 시작. 즉, 김민석이 이창윤 한정 바보가 된 시발점이 되겠다.
카카오와 버블티
이창윤 x 김민석
이창윤과의 연은 잊을만하면 다시 이어졌다. 세상이 아무리 좁다지만, 이창윤과 연결된 세상은 과하게 좁았거든. 진학한 중학교가 하필이면 옆 고등학교와 체육관과 급식소를 같이 쓰는 곳이었고, 심지어 결연을 맺기까지 해서 새 학기가 되면 옆 고등학교에다 헌정 공연을 한다고 했다. 당시 백석초 댄스부 짬바는 꽤 알아주는 편이었고, 그 소속이었던 민석은 당연스럽게 공연 팀에 이름이 오르게 됐다. 친구 몇몇과 남자 아이돌 커버댄스를 준비하던 민석은 공연 리허설 당일, 플라스틱 의자 1열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밀크야, 너 이름이 민석이었어? 귀엽다.'
리허설이 끝나고,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를 엎어 놓은 듯한 눈웃음을 흩뿌리던 이창윤은 내 명찰을 빤히도 쳐다봤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내 이름이 김밀크라도 될 줄 알았단 건가, 자기도 이핑키가 아닌 주제에. 아, 진짜. 신이 암만 똥손이라 해도 이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윤과 만났던 게임은 작년에 서비스 종료가 됐는데, 이렇게 또 이어지는 건 대체 무슨 픽션인가. 너무도 태연하게 말을 붙이는 창윤은 꼭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란 걸 다 알았던 사람처럼 굴었다. 이창윤은 지금 고삼이 아닌가. 고삼이면 입시 준비나하지 연출을 왜 맡은 거래. 민석은 차마 입을 열어 말은 못하고, 빤히 창윤의 얼굴만 봤다. 뭔데, 둘이 아는 사이야? 그러는 사이에 창윤의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이 민석을 두고 물음을 던졌다.
'어, 나 얘랑 결혼했었거든.'
어깨를 휘감으며 제쪽으로 끌어당기는 창윤에, 민석은 동그란 눈을 크게 떠올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치켜든 얼굴로 마주한 창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으니까, 부부 맞는데. 아니, 섭종된지가 언젠데…. 민석은 그때라도 눈치 챘어야 했다, 창윤에게 저당 잡힐 자신의 미래를. 하지만 홧홧해진 얼굴과 뜨끈하게 오르는 귓불의 열기에 대한 정의를 찾기에는 그 당시 민석은 너무 어리고, 꽤 순수한 편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대학에서 복학한 창윤을 또 다시 만났을 때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첫 사랑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난 우리 병아리가 과대 했으면 좋겠다.'
김민석은 이창윤 덕분에 '과대'란 시발 것의 타이틀을 1학년때부터 달고 살아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것을 나서서 쟁취했다. 창윤이 아니었더라면 생기지도 않을 모순이었다. 하지만 민석이 창윤에게 말리는 이유가, 비단 자신이 좋아하는 감정을 품고 있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창윤은 타고난 사기꾼이었거든. 그 언변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으며, 신뢰도마저 꽉 찬 문장을 구사함이 '완벽' 그 자체였다. 듣고 있으면 앓던 병도 나을 것 같았고, 걱정 근심도 다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이들 정도로 홀림직했다. 아마 이창윤이 사이비 종교에서 포교 활동을 했더라면 교인이 몇 만에 몇 십만은 됐을 지도 모른다. 교주 오른팔 같은 옆자리까지 꿰찼거나...아니다, 그냥 교주를 했을 거다. 아마 이창윤은 저 입만 있으면 어디서도 굶어 죽지는 않으리라, 민석은 생각했다.
그덕에 민석은 창윤이 잠깐 휴학을 한 폰팔이 시절에 바꾼 핸드폰만 네 개에 달했고, 카드와 보험을 부업으로 삼을 때 자기 명의로 가입한 신용카드와 보험이 몇 개씩이나 됐다. 인생 망하는 루트를 제대로 밟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호구가 되었나. 어려서부터 원하는 건 손에 꼭 얻고 마는 악바리에 영재소리는 다 듣고 자랐는데. 이대로라면 저를 키우느라 수고하신 부모님의 노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매번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때마다 생각뿐이었다.
-민석아, 너 어디야?
"아, 저 동문 앞에 카페인데요."
-야, 지금 창윤이 꼴아박았어.
"그래요?"
사실상 창윤만 제외하면 민석에게 변수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의 변화도 크지 않고, 적당히 냉정하고 이성적인 민석은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제 밥그릇을 잘 챙기는 편이었다.
-지금 너 찾고 난리도 아니야.
"……."
-빨리 좀 와봐.
근데 '이창윤'이 들어가는 모든 것에서는 바보가 돼버린다. 지금 어딘데요. 거기서 별로 안 멀어. 중앙사거리 옆에 작은 골목 알지? 거기로 들어가면 편의점 보이는데 바로 그 맞은편이야. 거리가 뭐 중요한 전제라도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미 김민석은 '이창윤' 이란 이름 석 자에 쪼르르 달려가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지 한참이었는데. 노트북과 프린트 물을 정리해 챙긴 민석은 얼른 엉덩이를 들어 일어났다.
"어? 민석아아ㅡ 왔어?"
"취했네요."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지, 여보도 한 잔 해ㅡ."
축하파티는 거의 끝물인지 뻗어있는 몇몇이 보였고, 얼큰하게 취한 창윤이 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저 놈의 여보 소리는 지겹지도 않나. 서비스 종료되기 전에 재빨리 이혼을 했었어야 했는데. 자신이 돈만 많았으면 중국 시장에 팔아넘겨진 게임을 역수입해서 당장 커플 파기를 했을 텐데, 라고 민석은 생각했다. 형은 제가 데리고 갈게요. 계산은 다 된 거죠? 제게 전화를 걸었던 현수와 몇 마디를 나눈 민석은 물먹은 대형 봉제인형 같은 창윤을 들쳐 매고 질질 끌었다. 그리고 창윤을 택시에 구겨 넣고는 익숙하게 창윤의 자취방 주소를 읊었다.
"으으ㅡ…."
몸뚱이를 집 침대에다 던져 놓기 무섭게 창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개밉상이다. 말만 뻔지르르한 넷카마 놈이 뭐가 좋다고 내가 이러고 있지. 반박 못할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반할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은데.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민석은 너저분하게 널린 옷가지들을 하나둘 줍기 시작했다.
"…그냥 냅둬, 내일 내가 정리할게."
민석은 잠인지 술인지에 취해 몽롱한 목소리가 흐르는 침대 쪽을 흘겨봤다. 그래봤자 옷 고를 때 다시 어지를 거잖아요. 그래, 그럼 다시 어지를 거니까 그냥 둬. 봤는데 어떻게 안 치워요. 입씨름이 몇 번 오가자 결국 창윤이 상체를 일으켜 일어났다. 아오, 나 얼마나 마신 거냐. 시야를 가리는 머리를 쓸어 넘긴 창윤이 민석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술값은 꽤 나왔던데요, 첫 월급은 카드빚 갚는데 다 쓸 듯. 약올리는 듯 한 말투의 민석이 어깨를 들썩였다.
"강현수야? 너한테 연락한 거."
"네."
"아, 그 새낀 맨날,"
"형이 나 엄청 찾았다던데요."
아냐, 그거 그 새끼가 머리 쓴 거야. 너 우리 집도 알고 하니까 떠넘기려고. 넌 전화하면 바로 튀어 오잖아. 아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창윤은 이제 익숙해질 법도한데, 어째 매번 씁쓸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천하의 몹쓸 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속으로 욕을 한 민석은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분류해 바구니에 담았다.
"해장이나 하러가자."
"지금요?"
요 앞에 24시하는 데 새로 생겼더라, 어차피 너도 밥 안 먹었잖아. 새벽 2시에는 갖다붙일 끼니 이름도 없는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민석은 대꾸 없이 창윤만 뚫어져라 봤다. 가자. 민석의 어깨를 잡아 돌린 창윤은 곧장 현관을 향했다. 무언의 반항은 1분도 가지 못한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창윤한테 게임이 되기야 하겠어. 앞서 가는 창윤을 뒤따라 민석이 종종걸음을 했다. 얼마안 가 도착한 가게 입구에는 개업 티 팍팍 나는 화환 몇 개가 서있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창윤이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들고 오는 사람에게 눈웃음을 쳤다.
"아멘ㅡ 형제님! 어디 교회 다니세요?"
저도 중앙교회 다니는데 이 집사님, 아시죠? 창윤이 눈썹을 한번 들썩였다. 어머머, 그 집 큰 아들인가? 둘쨉니다. 아, 둘째ㅡ.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교인들의 친목 다지기 정도라 생각할 것이다. 해장국 두 개를 주문 받은 가게 주인이 자리를 뜨자 민석이 물을 따라 하나를 창윤에게 건넸다.
"형, 개종도 했나보네요."
이창윤의 일상사기는 눈뜨고 코 베는데 특출났다. 쉿, 사회생활 다 이렇게 하는 거야. 창윤은 입 턴 서비스로 나온 왕만두를 민석의 앞 접시에 얹었다. 아니. 그건 사회생활이 아니고 명백한 사기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요? 란 질문에 창윤은 화환에 교회이름이 적힌 걸 봤다 그랬다. 저분이 사장님 아니면 어쩌려고요. 카운터에서 돈 세는 거 못 봤냐. 하? 하나라도 허투루 보는 게 없지, 역시 이창윤은 예사 놈이 아니었다. 회사는 언제부터 출근? 5월부터. 엄청 바빠지겠네요. 아마 그렇겠지. 그럼 이제 볼 일도 없겠다. 너 되게 그러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한다?
"당연하죠."
"허어ㅡ 섭섭하게 하네, 여보."
이창윤은 도톰한 윗입술을 삐죽였다. 차라리 눈앞에 좀 없으면, 호구 짓을 덜 할 것 같아서 해본 말이었다.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러다보면 이창윤은 나를 서서히 잊겠지. 그럼 나도 좀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당장은 힘들더라도, 핑크색과 숫자 12만 봐도 이창윤이 떠오르는 삶을 좀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
"법원에서 기다릴게요, 이혼해요."
딴에는 장단 맞추려고 쳐본 장난인데 이창윤은 대꾸 없이 입을 꾹 닫았다. 기분 나빴나. 자기처럼 잔망스럽지 않아서? 민석은 방황하던 수저를 식탁에 내려놨다. 화, 났어요? 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또 다시 발동하게 되는 이치였다, 이창윤 앞 한정 바보 김민석.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괜한 갈증에 냉수를 한입 가득 머금어 삼켰다.
"민석아,"
이창윤이 김민석을 불렀다. 드물게 목소리를 깔아 부를 때가 있긴 했는데, 거의 들을 일이 없었다. 대게는 뭔가 심각한 일이 있을 때였으니까. 이창윤이 김민석에게 심각한 일을 털어 놓은 적이 뭐 얼마나 있겠나. 5살이나 어린놈한테 의지를 할 것도 아니고. 게다가 사기꾼의 특성이잖아, 자기 얘기 잘 안 하는 거. 민석은 창윤의 얼굴을 마주봤다. 달달하게, 예쁘게 생겨가지고 존나 쓰기만한 카카오 같은 이창윤은 전에 저를 두고 버블티 같다고 그랬다. 사랑스럽게 생겨서는 속이 너무 불투명한 것 같다고. 내가 불투명해? 연락하면 바로 답장하고, 부르면 바로 달려가는 충성적인 사랑을 하는 걸 보고도 모르겠단 말인가. 알고 보면 이창윤이 더 바보 멍청이인 것 같다. 10년이 다 되도록 꼴받치는 이핑키는, 사기 칠 때만 천재성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까놓고 얘기 좀 할까."
창윤은 허리를 펴 등을 기대앉았다. 까다니. 십여 년 전 '이핑키'와 현피를 떴을 때 모든 걸 다 깐 상태였던 민석은, 더는 까 내놓을 게 없었다고 봤다.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분위기 조장하는 것도 이상했다. 이렇게 하면 내가 기대할 줄이라도 아는 건가. 그래봤자 배경은 해장국집에다, 무대소품이 해장국과 왕만두인데. 심지어 비지엠은 09년도 유행가였다. 캔 유 필 마이 허트 비트? 무드라고는 코빼기도 없었다. 이런 대화보다 식탁 위로 올라 아크로바틱 댄스라도 추는 게 덜 어색할 상황이라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물로 목울 축인 창윤이 다시 앞당겨 앉았다.
"여기 물맛, 어떤 것 같냐?"
물맛이라. 사실 맛은 모르겠고, 이창윤이 나를 제대로 물 먹이려는 것은 분명했다. 형, 저한테 뭐 또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죠? 눈치 빠른 민석이 선수 쳐 말했다. 그게 아니라, 아는 형이 정수기 사업을 하는데……. 그러면 그렇지. 빌어먹을 카카오새끼한테서 잠깐 단맛을 느꼈다는 건 쓴맛에 길들여져 마비된 혀가 도출한 착각에 불과했다. 해장이나 마저 하세요. 제 말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창윤은 알겠다며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잘 먹었습니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으며 가게를 나설 때, 주인아주머니께서 이 집사님에게 얘기 좀 잘해달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이창윤은 얼핏 당황한 행색이더니, 이내 말씀 잘 전해드리겠다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형, 그렇게 사기 쳐서 계속 볼 사람도 한 번 밖에 못보고 그러는 거예요. 걱정반 팩폭반으로 던진 말에 이창윤은 괜찮아. 난 너만 보면 되지,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계속 있어 준대요? 그래? 근데 민석아. 너 정수기……. 그만해요, 진짜. 호구 짓도 하루 한 번이면 충분했다. 오늘은 꽐라된 이창윤 픽업으로 미션 달성 했으니 더는 안 할 거였다. 아니, 나는 우리 혼수로 장만 하려고 했지. 그러나 이창윤은 늘 상상이상으로 치고 들어왔다. 짜증나.
"너 필요 없으면 됐고,"
"…형은 진짜 개새끼에요."
"알아."
그거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희미한 가로등 아래, 이창윤의 동그란 뒤통수가 누렇고 붉게 빛났다. 나는 굳이 이창윤네 집 앞까지 가서 들어가라 인사를 했다. 늦었는데, 자고 가. 이창윤은 뒤도는 나를 붙잡았다. 내가 형 덮칠까봐 안 되겠다고 하니 이창윤이 존나 처웃었다. 재밌냐. 근질거리는 입술을 꾹꾹 눌러가며 참았다. 내가 진짜 덮치면 어쩌려고 저러나.
"민석아,"
"...."
"내가 참았으면 더 참았겠지, 네가 무슨."
?
근데 이창윤이 괴상한 말을 했다. 괴상한 타이밍에, 괴상한 자세로. 이창윤의 현관문 바로 옆에서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식상한 헤테로 커플의 벽치기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가, 이창윤이랑. 이게 가능한 전개야? 여태껏 아무런 복선도 없었는데. 민석이 고개를 치켜들어 창윤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10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냐, 넌. 이창윤이 쪼끄마한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지금 이게, 무슨. 뭐하자는 거야?
"지금 정수기 사달라고 작업 치는 거예요?"
민석이 손을 잡아채며 말했다. 김민석, 넌 내가 영업에 눈 돌아간 놈으로 밖에 안 보이냐. 창윤은 억울하다는냥 호소를 했다. 그럼 평소 행실이 있는데, 쉽게 믿어질 리가 있나. 뒤지게 술에 쩔었던 신환회 당시만 해도 이창윤은 내게 '밀크야, 아니. 그…민석아.' 목덜미를 잡고 제법 도발적인 눈빛을 흘리곤 '우리 학교 넓어서 자전거 필요할 텐데, 형이 싸게 쳐줄게.' 따위의 말이나 했단 말이다. 틈만 나면 체인이 빠지는 민트색 고물자전거를 끌고 다니느라 하얀 손에 기름때를 달고 살았던 지난 몇 년을 생각하면 민석은 지금도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싸게 쳐? 값이 아니라 싸대기를 치고말고의 문제였다, 그 자전거는. 근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버리질 않느냐는 동기의 물음에, 민석은 나 아니면 거둬줄 사람이 없잖아. 라고 말했더랬다.
"그냥, 너한테 작업 치는 거야,"
"……네?"
"우리 사귈 때도 된 것 같은데."
"네?!"
갑자기 왜요? 마냥 좋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몰라. 근데 이창윤의 눈빛이 좀 진지해보인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긴 했다. 이제 그만하려고. 너 놀리는 거 재미없어서. 순간 기분이 확 나빠져서 이창윤이 개통해준 네 번째 폰으로 그 명치를 찍어버릴까 했지만, 다섯 번째 폰도 이창윤 손에서 개통될 것 같은 미래가 그려져 참았다. 형 진짜 다 알면서 나 갖고 노는 거죠. 다 아는 건 맞는데, 갖고 노는 건 아니래도.
"여태 너한테 사기 친 거 반성하면서 살고 싶어졌어."
"……."
"여보가 사기당하는 건 나도 같이 감당할 문제니까. 우리 부부잖아."
"씨발. 그냥 나 좋아한다고 평범하게 고백하면 안 돼요?"
"내가 그런 평범한 인재는 아니잖아?"
그렇게 이창윤은 끝까지, 김민석이 감히 예상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할 사람이었다.
-형 저번에 저한테 버블티 같다고 했죠?
-그랬나.
-근데 형이 버블티였던 것 같아요, 존나 불투명한 사람.
-내가 뭘. 넌 나한테 카카오라고 했지 않냐?
-그랬죠.
-그럼 그건 너야.
-제가요?
-엉, 너 생각보다 엄청 쓰다.
-그래서, 싫단 거예요?
-아니. 나 쓴 거 잘 먹어.
-뭐야.
-맛있다, 민석아, 너.
-형...방금 그말 변태 같은 거 알죠?
-네가 발랑 까진 건 아니고?
-카카오는 까먹어야죠.
-아…진짜, 김민석. 너 이리와.
-…싫어요, 가까이 오지 마요! 안 돼애ㅡ!
-完-
새로운 씨피에 치여서 기쁜 마음으로 합작을 신청했는데 저란 사람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주제를 정해주는데도 못받아 먹는 인간이었습니다...(통탄) 아앤파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ㅠㅠ 이렇게 어려울줄 생각지도 못한;;; 비록 저는 이렇게 말아먹었지만, 이런저런 합작이 계속 이어져서 옾페스가 떡상했으면 좋겠습니다 > < 그런 의미로 이번 합작 주최해주신 총대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합작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 다들 해피 알페스되시고, 오티피가 우주최강 씨피가 되길 바랍니다...<3
W. 찬물
